[최형심의 시읽는 아침] 류인서의 ‘거울’ 해설

2020-08-31     최형심 시인

거울 / 류인서

 

  시골집 수돗가 빛 바랜 저 거울에게도 어느 순간 반짝, 빛나던 때가 있었다.

 

  일생을 흘려보낼 조그마한 저수지를 이루었다고 세숫대야 물이 흰 부추꽃처럼 찰랑일 때

  아버지 돋보기 안경에 날아 앉은 잠자리가 멀리 있는 어린 자식 안부 편지를 읽을 때

  긴 여름날 마당가 백일홍 꽃 속에 더위 한 자락 싹둑 자르는 가위 소리 들릴 때

  오래 집 나갔던 맨 끄트머리 보랏빛 형제가 돌아와 일곱 색깔 모두 모였으니 어머 이리 나와 봐, 저기 무지개 떴어

  포도 몇 송이 놓고 식구들이 빙 둘러앉을 때, 으깨고 으깬 그 저녁의 육즙

  그리고 시골집 수돗가 거울이 마지막 반짝 빛나던 때, 이삿짐 나가고 식구들 다 떠나고 담장 밖 능소화가 적막한 등불 하나 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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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낡고 오래되어서 혹은 시대에 뒤떨어져서 반짝이지 않는 것들에게도 분명 빛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물을 가득 담고 찰랑거리는 세숫대야, 자식의 안부편지를 읽는 노인의 돋보기 위에 내려앉은 잠자리, 뜨거운 여름날 마당가에 핀 백일홍, 비 온 뒤 오랜만에 지붕 위에 모인 무지개 형제들,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포도를 나누어 먹는 저녁, 사람이 다 떠난 집 한구석에 버려진 거울에 비친 막 피어난 능소화……. 낡은 물건만 그런 순간이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나이 들어 뒷방으로 밀려난 사람이라고 다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