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칼럼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삼국유사와 사리장엄·사택선화(후)

  • 입력 2020.03.05 11:32
  • 수정 2020.03.08 14:40
  • 댓글 0

[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고려 말, 일연스님이 삼국유사 집필 때인 1279-81년께는 사리장엄 봉안 640년 후다. 사료가 없으니 구전을 기록했다. 사통팔달인 현재도 익산·경주는 200여 km다. 서동과 선화공주는 이의 수 배 거리를 돌았을 것이다. 국경의 무수한 성곽과 병사를 피해 백제로 금 한말을 갖고 올 수 있을까? 확연한 사투리로 서동요를 유포시키자마자 첩자로 발고돼 처형당했을 것이다.

사택왕후가 나오자 중앙탑과 동탑 발원자는 신라 선화공주라는 주장도 그렇다. 미륵사가 백제좌평(사택왕후)과 신라진평(선화공주) 합작품인가? 국립(왕립)사찰로 중앙목탑은 무왕, 동탑은 태자(훗날 의자왕)가 발원했을 개연성이 짙다. 사택왕후가 후궁인데 감히 국호를 붙여 ‘백제왕후’라니. 조립석탑石塔이 아닌 조립가람造立伽藍이다. 단순 서탑西塔 발원과 사리장엄 봉안자가 아니다. 가람은 미륵사 전체다. 사리장엄 ‘가람’과 삼국유사 ‘대가람’은 大자만 없을 뿐 똑같다. 백제좌평佐平과 신라진평眞平은 한문은 물론 발음도 유사하다.
위덕왕(재위 554-598) 사망 후 혜왕(598-99)·법왕( 599-600)·무왕(600-641)이다. 2년 만에 네 명이다. 왕권붕괴·귀족암투, 신라와 전쟁을 딛고 무왕 40여 년 통치는 백제귀족의 확고한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위 직후인 602년 좌평 ‘해수’ 장군이 이끈 백제군사 4만 명이 몰살한 ‘아막성’ 참패에도 궁궐에서 신라 선화공주와 사랑을 속삭이며 민심을 다독이고 왕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정실왕후 사택선화 부친인 막강한 좌평 사탁적덕이 아니면 해석이 안 된다.

산처럼 쌓인 금을 하룻밤에 보낼 궁궐은 사비(부여)밖에 없다. ‘진평과 무왕’은 ‘옹서’도 아니고 익산으로 천도기록도 없다. 백제멸망이 부여·공주에서 이뤄졌고 수도는 사비가 명백해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면 사비로 재천도 했다는 말인데 한중일 사서에 천도·재천도 기록은 전혀 없다. 무왕은 2년 후 사망해 봉안 당시 와병으로 미륵사에 오지 않은 것이 유력하다.

막강한 좌평佐平 사택적덕 셋째 딸이 “둘도 없이 아름답다.(미염무쌍美艶無雙)”는 말을 듣고 사투리도 같은 부여로 가 서동요를 유포시키고 익산으로 데려온 것이 아닐까? 사택적덕 조력으로 왕위에 올라 사자암으로 가다가 대가람(큰 절)을 세워달라는 사택선화 말에 따라 미륵사를 세우자 사택적덕이 막대한 재물을 희사하고 백공(장인)을 보내 도운 것으로 사료된다.

사택왕후는 미륵사(탑) 발원·봉안·시주·건립 주체다. 미륵사·제석사 건립, 왕궁성 개·보수, 사비성 중축, 궁남지 조성은 수 조원이 들어갈 대역사다. 마를 팔아 살던 서동이 무왕으로 즉위해 수많은 전란에도 40여 년을 통치하고 훗날 수명이 산악처럼 견고토록 간구한 것은 서동과 사택선화 지극한 사랑이 근원이 아니었을까?

의자왕(641~660) 2년인 ‘일본서기’ 642년 기록에 “모후인 ‘국주모國主母’(나라 주인인 어머니)가 죽자 왕자 ‘교기’를 비롯해 여동생과 관리 40여 명을 추방했다.”는 국주모가 사택왕후다. 일본 시각에도 국모國母(나라 어머니)보다 훨씬 강한 ‘국주모’다. 막강한 권력과 재력의 좌평 사택적덕이 실질적 ‘나라 주인’으로 사택왕후를 결혼 전, 선화공주라 칭했을 가능성이 짙다. 사택왕후가 ‘아들이 없어(?)’ 후궁 소생인 의자왕이 40세 가까운 매우 늦게 태자로 책봉(632)된 것은 아닐지? 사택 위세에 눌린 태자 시절, “효도로 섬기고 형제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으나 집권 후, 사택왕후가 죽자 사택세력을 거세한 것으로 풀이된다. 봉안(영)기에 대왕폐하 만수무강 내용만 있을 뿐 태자(훗날 의자왕) 언급이 없는 점도 이를 반증한다.

‘삼국유사와 사리장엄’은 한 가지만 빼고 모두 일치한다. 삼국유사 기록에서 ‘신라 선화공주’ 대신 ‘사택왕후’를 삽입시키고 ‘경주’ 대신 사택적덕이 머물렀을 ‘부여(사비)’를 대입하면 삼국사기·화랑세기 등에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 결혼기록이 없는 점과 사리장엄·일본서기 등 한중일 사서와 명문 등에 상호모순이 전혀 없다. 아막성 참패에 왕권유지도 이해된다. 사택선화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용화산(미륵산)과 부소산은 같은 백제 수도권이다. ‘수도권 외곽 익산 서동과 수도권 중심 부여 사택선화’일 개연성이 매우 짙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놓치면 후회할 이시각 핫이슈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