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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백제사, 역사왜곡 중단돼야!

  • 입력 2020.03.10 13:52
  • 수정 2020.03.1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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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고주몽 아들, 온조가 세운 백제는 한성(서울)백제(BC18~475)·웅진(공주)백제(475~538)·사비(부여)백제 (538~660)로 나뉜다. 한성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 함락되고, 개로왕이 살해당하자 문주왕(재위 475~477)이 웅진으로 천도했다. 동성왕(479~501)은 백·사·연 씨 등 웅진세력과 한성귀족 균형을 꾀했다. 백제를 22개로 나눠 ‘담로장(분국왕分國王)’이 통치하는 담로제를 확립해 6세기 ‘웅포 입점리고분’ 왕족이 사용한 금동제 장신구에서 확인된다. 분국왕이나 왕을 폐위·옹립할 좌평 사택적덕 딸도 결혼 전 공주로 칭했을 가능성이 짙다.

고구려 남하에 493년 신라 소지왕과 결혼동맹을 맺어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한 동성왕도 좌평 백가에 살해된다. 무령왕(501~523)이 백가를 토벌하고, 사비천도는 성왕(523~554) 16년(538) 이뤄졌다. 사비를 상·중·하·전·후 오부五部로 나누었는데 금제소형판에 “중부 덕솔 ‘지율’이 금 한 덩어리 보시한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와 “하부 비치부와 부모처자가 함께 보시한다.(下部非致夫及父母妻子同布施)”는 명문이 있다. 청동합에는 ‘상부달솔목근上部達率目近’이 새겨졌다. 상부달솔은 사비 북쪽관리·중부덕솔은 궁궐관리·하부 비치부는 남쪽 민간인 같다. 하부 ‘비치부’는 관등은 없으나 삼엄했을 공양에 부모처자와 보시해 최고위층이다. 상·중·하부에서 참여했으며 사비부터 사택왕후를 수행했을 것이다. “서동이 웅진시대 무령왕이다.”거나 사비 수도를 확증할 삼국사기 등 무수한 기록과 함께 ‘무왕 익산천도’에 반박자료다.

성왕은 연합한 진흥왕에 553년 한강하류를 뺏기자 아들 ‘여창’과 신라를 정벌하다 관산성(옥천)에서 전사한다. 여창이 즉위한 위덕왕(554~598)·혜왕(598~599)·법왕(599~600)을 거쳐 서동의 30대 무왕(600~641)이다. 극도 혼란을 딛고 무왕 42년 통치는 신라 진평이 아닌 ‘막강한 백제귀족 지원’ 없이 불가능하다. 삼국유사 외에 한중일 사서에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 결혼기록이 없는 것은 ‘망국이 된 백제 안의 결혼’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짙다.

봉안기가 나오자 미륵사 초창初創은 신라 선화공주, 중창重創은 사택왕후가 했을 것으로 일부에서 주장하나 무왕 초 602년 아막성 전투에서 신라 진평 군사에 백제군 4만 명이 몰살해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궁궐에 있다는 것은 전혀 믿을 수 없다. 엄청난 참패에도 왕권유지는 사택적덕 가문 강력한 후원이 아니면 해석이 안 된다. 사택왕후는 무왕 즉위 전, 결혼한 사택선화가 유력하다. 삼국유사에 ‘대가람大伽藍’을 원했다는 신라 선화공주와 사리장엄에 “깨끗한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만들어 세웠다.”는 백제 사택왕후는 동일인이다.

서동이 목숨을 지키러 숨어 ‘마’를 캐 연명하다 미염무쌍 ‘사택선화’를 찾아 사비에서 서동요를 유포시킨 것으로 사료된다. ‘흙처럼 쌓인 황금’을 지명법사를 통해 하룻밤에 사비 명문거족 좌평 사택적덕에 보내 인심을 쌓고 사택선화와 결혼해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론된다. 진평眞平과 좌평佐平은 한문은 물론 발음도 비슷하다. 사비궁 중수·부여 왕흥사·궁남지, 건평만 1만 평 미륵사, 왕궁성 개·보수, 제석사를 조영造營 하려면 수조兆가 들어간다. 사택적덕이 강력 후원세력이었다. 봉영 640년 후 일연 스님도 사료가 적어 사택선화가 신라 선화공주로 바뀐 구전을 삼국유사에 기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발해 역사를 편입하려는 중국 ‘동북공정’이나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200년간 지배했다는 일본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역사왜곡이다. 백제왕도(익산천도) 운운하며, 기자조선(후조선) 마지막 왕으로 후後 마한 시조인 무강왕(기준箕準)릉이라는 수많은 사서를 무시하고 무왕릉이라는 단정도 역사왜곡이다. 대왕릉이 사비에서 사망한 무왕릉이라면 100여 리 시신을 운구했다는 거다. 소왕릉도 애초 없던 신라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왕후여야 한다. 그러나 무왕도, 사택왕후도 아닐 가능성이 짙다. 역사왜곡에 편승해 발굴예산과 연구비·강연료 등을 엄청 챙겨 ‘발굴재벌(?)’까지 생겼다는 비판을 무시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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