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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마한 무강왕이 원시조인 ‘청주한씨’와 ‘부여씨’

  • 입력 2020.03.1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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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마한 조상, 무강왕武康王(호강왕虎康王) 능을 도굴하다가 체포돼 전법사에 구속된 도둑이 달아났다. 정승 정방길이 전법관을 탄핵하려니 찬성사 임중연이 막으며 ‘도둑을 2년간 가두어도 장물은 없고 죽은 자도 많다’고 했다. 정방길은 ‘나도 무덤을 파낸 자에 금金이 많다는 것을 안다. 거제도 세금을 모르게 먹은 자가 누구냐?’고 누차 욕하자 임중연은 부끄럽고 분해 병이 생겼다. 주변 공론은 ‘정방길 말이 옳다’고 했다.” 고려사·고려사절요에 기록된 충숙왕 16년(1329) ‘쌍릉’ 도굴사건으로 전법관과 임중연의 뇌물을 통한 탈옥 방조·비리를 강력 시사했다. “선화공주든 뭐든 만들어서라도 익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역을 위해 당연한 것 아닌가?” 어떤 문화관계자가 누차 필자에게 강조한 말이다.

쌍릉(대왕릉·소왕릉) 최초 발굴은 1917년 ‘야쓰이세이치(곡정제일谷井濟一)’가 주도했다. 충숙왕 때 도굴 등으로 별 유물이 없었다. 금송으로 추정되는 목재 관, 토기, 치아 소량, 관장식이 나왔다. 남녀 구별은 주로 치아나 골반 뼈로 판단한다. 대왕릉 어금니로 여성이라고 판정해 선화공주나 (사리장엄으로) 사택왕후이거나 소왕릉이 마한 무강왕이나 백제 무왕 주장까지 나왔다. 세이치 발굴 3년 후 보고서에도 “대부분 유실되고(중략) 옛적 발굴돼 도제 등을 발견하는데 그쳤다. 소왕묘도 발굴 흔적이 있고 옛적 도굴위험에 처해 무슨 부장품이 있을까?”라는 논조로 기록됐다. 대왕릉 청주한씨 공적비에도 “1923년 왜인이 도굴을 자행할 때 후예 ‘(한)창석’이 매일 도굴현장을 답사해 쌍릉 주인이 (마한)무강왕임을 확인했다.”고 기록됐다. 누차 도굴과 발굴이 이뤄졌다. 이런데도 6억5천만원을 들여 재 발굴 등을 강행해 ‘돈잔치’ 비판이다.

공기에 여러 번 노출됐는데 2018년 3월 나무 유골함에 담긴 뼛조각 102점이 발견돼 그해 7월 공개됐다. 161~170㎝ 키에 육십 대 이상 남성 한 사람 것으로 정강이뼈에서 떼어낸 시료를 분석해 연대측정 결과, 620~659년 숨진 것으로 발표됐다. 일부 학자는 “무왕이십니다. 예를 표하시죠.”라고 해 뼛조각에 고개를 숙였다.

청주한씨 종원들은 각종 의문을 제시한다. “세이치 발굴 때 여성 치아 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많은 남성 인골이 발견된 점, 청주한씨 종원과 함께 능에 들어가기로 해놓고, 종원을 배제한 채 인골 발견이 이뤄진 점, 신라 왕릉급 무덤에도 대부분 치아 등 일부 인골만 발견되는데 누차 공기를 쐰 대왕릉에서 1400년(무왕 기준)에 가까운 대량의 인골이 발견된 점”, “‘학맥’으로 연결된 사학계를 믿을 수 있는가”와 “순장 유골인지 모르는데 100% 정확치 않은 연대측정으로 무왕릉으로 단정한 점” 등이다. 졸지에 청주한씨 원元시조인 마한태조 무강왕이 백제왕족 ‘부여씨’가 됐다. 무왕은 휘諱가 ‘장璋’으로 ‘부여장扶餘璋’이다. 청주한씨 반발은 당연했다.

‘조선왕 기준의 마한 개국, 궁평은 마한 내궁內宮, 쌍릉은 마한 무(호)강왕 능’이라는 무수한 기록도 무시됐다. 고려사·고려사절요·연려실기술·삼국유사 마한편과 무강왕 세보에 따르면,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기)준’이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 땅에 나라를 세워 마한 태조(무강왕)”라 했고, “마한 8대 원왕元王 세 아들이 북원(태원)선우씨·상당(청주)한씨·덕양(행주)기씨 시조다”는 것이다. 청주한씨는 원왕 둘째 ‘우량’ 원손인 고려 개국공신 한란韓蘭이 시조이므로 무강왕은 원시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세종실록지리지·후한서·권람 응제시주·다산 정약용 아방강역고·1872년 익산군 지도에도 무강왕(기준)으로 기록됐다. 기준성(미륵산성)도 있다.

삼국사기에 무왕의 사비(부여)와 웅진(공주) 활동 기록은 상세하나 익산 기록은 없다. 나당 연합군도 금강과 탄현을 지나 사비로 직행했다. 사비가 위험하자 웅진으로 도피한 의자왕은 사비 함락과 ‘예식(진)’ 웅진 성주가 항복을 주도해 패망했다. 의자왕 등은 당나라로 끌려갔고, 당은 웅진 등에 5도독부를 설치했다. 패망이 부여·공주에서 이뤄졌고, 도독부 설치에도 익산 왕궁성은 배제됐다. 무왕의 ‘익산천도(백제왕도)’ 주장과 ‘대왕릉이 무왕릉’이라는 단정은 너무 나갔다. 함부로 역사 재단裁斷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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