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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이성복의 ‘봄날’ 해설

  • 입력 2020.03.1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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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 이성복

 

1

  어떤 저녁은 식육식당 생철대문 앞 보도블록 사이에 하얗게 피어 있었다 나는 바람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저녁은 소스라치며 떨고 있었다 나는 또 스쳐가는 내 발걸음에 깨알 같은 그것들이 으스러지고 말 것 같아, 잠시 멈춰 섰다 아무도 찾는 이 없고 아무도 전화하지 않는 예순 넘은 봄날 저녁이었다

 

2

  어느 날이었는지 몰라 그리움이 그냥 가렵기만 해서 집을 나섰어 안 되는 줄 알았지만 그리움이 보채기만 해서 자꾸 달래주었어 얘야, 네가 이러면 난 많이 힘들단다 알아, 나도 알아, 여러 날 네가 먹지 못했다는 걸, 마시지 못했다는 걸 봐, 보라니까 내가 너한테 해줄 게 없다는 걸 어느 날이었는지 몰라 풀 비린내 진동하는 방뚝에서 그리움을 떼내버리고 혼자 돌아왔어 알아, 나도 알아, 네가 많이 힘들다는 걸

 

3

  한 사내가 깊이 담배를 빨아당겨도 봄은 가지 않는다 봐라, 임대아파트 앞에서 어정거리는 노인들과 딱지 치는 아이들은 잠시 후면 지나갈 테지만 봄은 가지 않는다 아직 목련은 덜 피었고 개나리도 한창이 아니다 한 사내가 폐 속 허파꽈리 하나하나가 펑펑 터지도록 담배를 깊이 빨아당겨도 봄은 가지 않는다 봄은 아직 오지 않은 것, 영영 오지 않을 것 사내는 저 혼자 중얼거린다 저 꽃들이 저만큼만 피고, 더는 피지 않았으면 저도 몰래 져버렸으면…… 아흔 넘은 그의 어머니는 몇 년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는 찾아가보지도 않고 덜 핀 목련처럼, 덜 핀 개나리처럼 바라만 보고 있다 엄마한테는 안 갈 거야…… 한 사내가 필터 앞까지 타들어온 담배를 어떻게 꺼야 좋을지 모를 때, 길가에선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폐지 가득 실린 리어카 타이어에선 바람이 새고, 사내의 손에서 담배 필터가 다 녹도록 봄은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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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그 옛날 중국의 미녀 왕소군(王昭君)은 오랑캐 땅으로 시집을 가며 그렇게 읊었다지요.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다라고. 봄날이 이렇게 우울해도 되나 싶습니다. 만물이 소생하고 약동하는 봄날과는 대조되는 임대아파트 앞 건조하고 먼지 냄새나는 풍경이 마치 황사로 누렇게 변한 풍경 같습니다. 자리에 누워 일어날 수 없는 노모,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다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폐지가 가득한 리어카에 앉아 남자는 폐가 터지도록 담배를 피웁니다. 봄은 왔으나 진정한 의미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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