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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천서봉의 ‘나비 운용법’ 해설

  • 입력 2020.03.3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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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운용법 / 천서봉

 

  #a

  홀로 나는 부끄러워 몇 번이고 얼굴을 감싸 쥐다 무릎 사이에 귀를 묻다 생각한다 죽고 싶다……, 이것은 다시 사춘(思春)인가

  어떤 사랑도 아름답지 않고 어떤 중독도 마침내 시들해질 때, 나는 편견이 없는 연대의 한 마리 나비가 된다 : 그것은 두 치 정도의 생물로 마치 넓은 소매를 펄럭이듯 하늘에서 움직이는……, 이라고 목인에 의해 처음 기록된다 공중에서 누구도 살지 않을 때 나는 기괴한 음악이거나 오염되지 않은 공포다 영어(囹圄)에 든 채 당신에게 가거나 혹은 가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는 부끄러움으로 마침내 죽고 싶다고…… 나는 여러 번 처음으로 자살한 어떤 연대의 나비가 된다 : 그것의 불가해한 무늬는 문자를 닮았으나 문자 아니고 마치 소리를 붓으로 그려놓은 듯한……, 이라고 당신에게 음각된다

  페이지가 한 번 펄럭일 때마다 백년이 흘러갔다 두 귀는 날개의 퇴행이므로 바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부끄러울 때마다 전생의 무늬가 붉게 떠올라 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나비는 아무런 죄가 없다

 

#b

나비는 죄가 없으나

침묵과 놀며 창문을 존경하고 요절을 동경하다가

버스 한 번 타면 갈 수 있던 당신에게 못 간 시간을

이제 나비라고 불러야겠다

 

호명하기 어려워 꼭 쥐고 있던 성대와

붙잡을 수 없어 귀가하던 손금의 불안한 무늬조차

이제는 나비라고 하자 나비라 부르면

왼편에서 당신의 월요일이 시작되고

동시에 오른편에서 나의 일요일이 저물 것이므로

갑상(甲狀)의 아이들이 돌멩이처럼 졸고 있는 사원과

슬픔으로 부풀어가는 사거리 가로등 사이에서

나는 저울 같은 잠으로 오래 경련할 것이니

 

내가 당신에게 못 가던 발작의 시간들을

간단하게 나비라 쓰자

봄의 이곽(耳郭)을 떠도는 추억의 고요를 나비라 읽자

용서는 바라지도 않을 이번 생엔

영원히 마음의 정처를 얻지 못할 것이므로

 

그러니 나비라 부르자 당신과 나 사이

창궐하던 층계를, 찬란히 피던 실패의 전부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아무리 성공한 사람이라도 이루지 못한 꿈 혹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미련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시 속의 나비는 미몽(迷夢)입니다. 잡힐 듯 영원히 잡히지 않는 아름다운 꿈입니다. 제대로 불러보지도, 전력으로 달려가 움켜쥐지도 못해본 지나버린 인생의 봄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망령입니다. 나에게서 멀어져만 가는 그 날개는 참으로 오래도록 경련한 기억,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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