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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읽는 아침] 함기석의 ‘음시’ 해설

  • 입력 2020.04.1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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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시 / 함기석

 

오늘밤 장미는 세계의 반()기획이다

죽은 자들의 죽지 않는 발이 해저를 걷고 있다 그것이 내 몸이다

천둥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아픈 발을 뿌리내릴 때

소리는 빗물이 꾸는 가시 꿈, 사방에서 악의 술어들이 취하고

 

우리는 우리의 주검에 핀 살의 현상이고 음시다

수천의 혀를 날름거리며 피 흘리는 사전, 그것이 내 몽이다

에포케 씨가 살로 세계를 쓸 때, 끝없이 제 살을 찢어 흰 숨결에 섞는 파도

그것 또한 내 몸이니, 연기 내며 비는 귀부터 타오르고

 

오늘밤 장미는 견고한 유머고 종이요새다

벼락 속에서 지상의 모든 이름을 버린 어휘들이 태어나 웃을 때

섬광으로 피는 꽃들은 혼들의 무수한 편재다

()과 골() 사이, 밤은 늘 검은 수의를 입고 창가를 서성이므로

 

거대한 홀이 뚫린 이 세계의 중앙국 음부에서

(이 괄호 안의 세계가 open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제2의 주어

당신은 언어 속에서 살해되는 ING 생체다

(이 비극의 괄호 밖 세계도 open임을 확증할 수 없다)는 제3의 주어

나도 이미 언어 속에서 화형 중인 ING 사체이니

 

장미는 장미의 유턴이고 돌에 고인 번개다

장미는 시가를 물고 흑풍 속에서 백발을 흩날리는 양초인간

이 비극을 빗줄기는 흰 척추를 드러낸 채 밤새 대지에 음사하는데

이 참극을 새들은 살을 흩뿌려 잠든 잠을 깨우는데

 

망각되지 않는 어휘들, 오랜 연인처럼 내 살 속 해저를 걷고 있다

죽은 자들의 목이 해파리처럼 수면으로 떠오르고

절벽 위엔 팔만사천 개의 손들이 공중을 한 장 한 장 찢어 날리고

흰 사리 문 목어들이 북천에서 헤엄쳐오니

 

오늘밤 장미는 불의 유마경, 얼음의 유머경이다

산 자들의 죽은 발이 꽃밭을 걷고 있다 그곳 또한 내 몸의 적도이니

에포케 씨는 펜을 던져, 천둥이 살던 지하의 관시를 파묘하라

악의 술이 번지고 번져 닿는 저 세계의 실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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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비현실적인 것이 더 현실적일 때도 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전위적인 접근방식을 채택한 이 시는 비장하고 난해합니다. 하지만 꿈이라고 생각하거나 한바탕의 몽상이라고 생각하면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이 시는 우리는 우리의 주검에 핀 살의 현상이며 끝내 흙으로 돌아갈 물적 덩어리일 뿐이라고 합니다. 삶이란 환상이며, 현재와 가상의 미래 사이를 넘나들며 죽음을 살아내는 모순적인 상태라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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