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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곽은영의 ‘개기월식’ 해설

  • 입력 2020.07.0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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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기월식 / 곽은영

 

  밤의 문이 열렸어요 이 세계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800Cal 가게 문을 열고 누가 왔어요 저녁을 먹다간 입가 훔치며 정육점 여자는 일어섭니다 반쯤 닫힌 문틈으로 둥근 밥상 가장자리가 보여요 오늘은 개기월식이 있겠습니다 어린 딸 리모컨을 눌러요 채널을 바꿔요

  여자는 손님에게 웃어보이지요 붉게 물든 장갑을 끼고 비닐장갑을 또 끼고 차가운 살덩어리 하나 척 베어서 저울에 올려요 200g 중력이 달랑 하늘에서는 쓱쓱 사라지는 하얀 달조각 여자는 능숙하게 고기를 썰어요

  엄마 나 쉬 마려 칭얼대는 딸 탁탁탁 도마에 칼을 부딪치며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해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쓸어모아 검은 비닐에 담아 들려 보내요 달랑 떠 있던 마지막 달조각이 사라졌어요

  달이 밟고 가는 모든 길에 검은 비단을 깔고 바람은 휙휙 채찍질 구름마저 쫓아버렸어요 이제 무엇을 바치오리까 보셔요 은빛 가면 벗고 강림하신 핏빛 달님 여자는 장갑을 벗고 선지 한그릇 뚝 떠내요 스테인리스 밥그릇 안에 오늘은 핏덩어리 달이 잠겨요

 

  36.5 365

  달님의 체온은 몇 도인가요

 

  엄마 나 정말 쉬 마려 발 동동 구르는 딸 여자는 계집애 팔 잡고 한 볼기 때리고 바지를 까내리고 엄마 한 번 쳐다보고 제 오줌줄기 한 번 쳐다보고 바람이 보듬어가는 어린 것의 지린내 윤기나는 밤의 비단에 싸서 달님 앞에 내려놓아요 하얗고 새초롬한 아가씨 얼굴로 돌아오는 달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여자와 아이가 다시 밥을 먹어요 리모콘을 눌러 채널을 돌려요 달은 개기월식 궤도를 완전히 벗어났어요 그녀 힐끔, 가게 문을 쳐다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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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얼마 전, 일식이 있었습니다. 은박지 너머 한 입 베어 물린 태양을 보며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작품은 개기월식의 먹고 먹히고 배설하는 과정을 정육점이라는 공간에 형상화했습니다. 둥근 밥상에서 정육점 여자와 아이가 저녁을 먹고 있습니다. 손님이 오자, 여자는 문을 반쯤 열고 밖을 내다봅니다. 문틈으로 둥근 밥상 가장자리가보입니다. 여자가 차가운 살덩어리 하나 척 베어서 저울에올리자, 하늘에서 달이 사라집니다. “엄마 나 쉬 마려라고 보채던 딸아이가 둥근 볼기를 드러내고 오줌을 눕니다. 이윽고 달이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손님도 가고 월식도 멈추자, 모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밥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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