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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백상웅의 ‘폭설의 기억’ 해설

  • 입력 2020.07.1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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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의 기억 / 백상웅

 

 1

 북받친 사람처럼 눈 쏟아졌다. 녹슨 용골 드러낸 어선은 급한 마음에 뱃머리를 항구로 돌리고 육지를 밀었다. 눈발은 그대 아픈 곳에 관심도 없어 척추 부러진 어선을 껴안았다. 뼈마디 뚫고 솟아오른 엔진이 늙고 비릿하였다. 눈덩이가 기름때 낀 심장을 철퍽 삼키며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파란 페인트칠 벗겨진 앙상한 배를 하얗게 씹으며, 눈발은 고장난 어선의 멱살을 잡던 쇠줄을 깨물어 끊었다.

 2

 백년 만의 폭설이라고 했다. 마을 바깥에 그리운 이 있었지만, 발신음은 산을 넘지 못하고 귓바퀴에 차가운 신호음만 뿌렸다. 귓밥을 파내면 짠한 이름만 묻어나왔다. 주먹 쥐면, 길은 튼 손등처럼 툭 끊어졌다. 그리움도 백년 만에 부러졌을까? 혼자 남을 때, 내 사랑의 방식은 바닥에 깔려 출항을 기다리는 그물이었다. 겨울볕에 누워, 얼고 젖기를 반복하며 어선의 등에 업히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것. 발자국은 방파제 끝까지 질질 끌려다녔다. 눈덩이가 바다로 떨어질 때 배의 후미는 출렁 가라앉았고, 폐선의 굽은 등에 꽂힌 깃발은 외로운 이의 발자국을 내놓으라는 듯, 하얀 쇠창살에 갇힌 수평선을 그만 놓아주라는 듯, 온몸으로 울며 눈송이의 귀싸대기를 올리고 있었다. 허공 속에 오롯이 찍혀 있는 눈송이의 발자국, 오래 서 있었기에 단단한 발자국이 먼 바다로 밀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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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코로나로 모든 것이 마비된 지 반년이 지났습니다. 눈도 오지 않는데 폭설의 한가운데 고립된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쇠창살”에 갇힌 것 같기도 합니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납작 엎드린 채, 얼른 폭설이 지나가서 출항할 수 있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버티고는 있지만 “한없이 기다리는” 일상에 점점 지쳐갑니다. “마을 바깥에” 두고 온 “그리운 이”를 그리워하듯, 코로나 이전의 평범한 일상이 사무치게 그리운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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