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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이윤학의 ‘파라핀 오일램프’ 해설

  • 입력 2020.12.0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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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핀 오일램프 / 이윤학

 

당신은 눈썹을 염색해놓은 개들을 호두나무 밑에서 풀어준 적이 있다

산책로의 솔가리를 손가락 갈퀴로 긁어 쌀자루에 담았다

춘설(春舌)* 아래 대바늘을 숨긴 불쏘시개를 포개놓았다

 

겨울의 봄날, 당신은 귀신이 잘 붙는 사람이었다

새벽의 산책로를 걸어가는 당신의 사리목舍利木 지팡이

당신은 노랗고 붉은 파라핀 오일램프를 이중 창틀에 올렸다

창에는 격자무늬 방들이 세워졌고 성에가 조이는 늪지에서

당신은 머리를 들었다 숨을 몰아쉰 당신의 입에서는

에어 스프레이건 응축된 맹물 미립자들이 갈 데 없이

분사되었다

 

며칠째 싹이 나기 시작한 감자 다섯 개를 오랜만에 찾아온 귀신이 깎아버렸다

당신의 메모지 낙서를 미니 장작 난로가 데운 바람이 읽어주었다 그래도 나는

오늘 감자볶음을 끼적였으니 저녁부터는 잠든 척 연기에 몰입하겠다

 

수시로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그때마다 팔등을 비틀었다 푸른 멍들 당신이 시원하게 도려내주었다 나는 벌써 감자볶음을 소화한 뒤이니 이제부터 돋아나지 않을 새살을 기다려도 되겠다 어느 날은 산양의 뿔이 된 손톱을 정리할 것이고 또 어느 날은 무심코 붓을 쥐고 떨고만 있어도 행복하겠다

 

겨울의 실언(失言) 봄날이었다 출입문이 열리자 파라핀 오일램프 불이 꺼지듯 어두운 얼굴이 그보다는 빛나는 손으로 파벽돌을 더듬었다

 

당신의 오막살이 화실 전기가 나간 지 꽤 되었다 이렇게 될 줄 당신만 미리 알았다는 것 꺼진 불이 어디에도 옮겨 붙지 않았다는 것 당신은 잠들거나 기도하기 위해 불을 켜는 사람은 아녔다

 

허공의 안개가 들어찬 당신의 머릿속

당신이 내친 인격들이 외면당한 당신을 찾았다

 

* 추녀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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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편리함과 속도에 밀려 사라진 것들 중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램프가 아닐까 합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한 후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졌지만, 인터넷 쇼핑몰에는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에서나 봄직한 파라핀 오일램프들이 즐비합니다. 손편지나 벽난로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은 화가와 전기가 나간 오두막, 그리고 창가에 놓아둔 파라핀 오일램프와 아직도 훈훈한 온기를 전하는 장작 난로……. 마치 미장센이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를 닮은 이 작품은 낡고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것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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