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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이규리의 ‘저녁의 문’ 해설

  • 입력 2020.12.3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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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문 / 이규리

 

서풍은 서쪽으로 부는 바람 아니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하나

그냥 다 서풍만 같다

이파리 뒤에 숨은 열매가 말라가고 있을 때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너는 물었다

마른 덩굴은 끝내 팔을 풀지 않고 생을 마쳤는데
그 안은 비어 있었고

어느 쪽으로도 갈 곳이 있지 않았다

거미는 거미를 사랑하고
벌새는 벌새를 부르고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말라가던 열매가 빨갰는지 어땠는지 너는 다시 물었지만
그 말도 비어 있었다

떠나는 일이야말로 서쪽이었는데

그토록 아프다 하면서 세계는 변하지 않는 것이지

꽉 낀 팔을 풀어주고

어느 쪽으로 가는지
어느 쪽에서 왔는지

꼭 다문 입술 어두워지는 문밖으로

다만 서풍이라 싶은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서쪽은 해가 지는 쪽, 서쪽은 그림자가 길어지는 쪽, 서쪽은 어둠에 한 발짝 다가가는 쪽, 서쪽은 “저녁의 문” 앞에 이르러 마주하게 되는 쪽입니다. 여러 면에서 서쪽은 겨울이 오기 직전의 늦가을과 닮아있습니다. 그곳에 이르면 “열매”도 “덩굴”도 말라가다가 마침내 속이 텅 빈 채 생을 마치게 되니까요. 서쪽은 더는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는 곳, “어느 쪽에서 왔는지” “어느 쪽으로 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어두워지는” 곳, 그러니까 서쪽은 서글퍼지는 쪽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시인이 “떠나는 일이야말로 서쪽”의 일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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