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문 / 이규리
서풍은 서쪽으로 부는 바람 아니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하나
그냥 다 서풍만 같다
이파리 뒤에 숨은 열매가 말라가고 있을 때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너는 물었다
마른 덩굴은 끝내 팔을 풀지 않고 생을 마쳤는데
그 안은 비어 있었고
어느 쪽으로도 갈 곳이 있지 않았다
거미는 거미를 사랑하고
벌새는 벌새를 부르고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말라가던 열매가 빨갰는지 어땠는지 너는 다시 물었지만
그 말도 비어 있었다
떠나는 일이야말로 서쪽이었는데
그토록 아프다 하면서 세계는 변하지 않는 것이지
꽉 낀 팔을 풀어주고
어느 쪽으로 가는지
어느 쪽에서 왔는지
꼭 다문 입술 어두워지는 문밖으로
다만 서풍이라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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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은 해가 지는 쪽, 서쪽은 그림자가 길어지는 쪽, 서쪽은 어둠에 한 발짝 다가가는 쪽, 서쪽은 “저녁의 문” 앞에 이르러 마주하게 되는 쪽입니다. 여러 면에서 서쪽은 겨울이 오기 직전의 늦가을과 닮아있습니다. 그곳에 이르면 “열매”도 “덩굴”도 말라가다가 마침내 속이 텅 빈 채 생을 마치게 되니까요. 서쪽은 더는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는 곳, “어느 쪽에서 왔는지” “어느 쪽으로 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어두워지는” 곳, 그러니까 서쪽은 서글퍼지는 쪽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시인이 “떠나는 일이야말로 서쪽”의 일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