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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미얀마(前)

  • 입력 2021.03.2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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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2월 1일, 쿠데타 이후 미얀마 군경 유혈진압으로 200여 명이 사망했다. 열흘 만에 비슷한 사망자가 발생해 훨씬 잔인했고 치밀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연상된다. 시위 중심 ‘양곤(랭군)’이 북위 17도, 북부 만달레이가 22도 정도이니 1980년 5월18-27일까지 ‘열흘 항쟁’ 광주와 옷차림이나 나뭇잎 등이 비슷하다. 미얀마와 광주는 유사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다.

박정희 5.16 직후인, 1962년 네윈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군부정권이 2015년까지 계속됐다. 48년 영국에서 독립한 버마 수도는 ‘양곤’이었으나 89년 군부정권은 “버마는 영국식민지 잔재이고 버마족과 130여 소수민족까지 아우르는 명칭이 아니다.”며 ‘미안마’로 변경한다.

인구는 5400만으로 한국과 비슷하나 면적은 67만6천여㎢로 한반도 세 배다. 시위 진앙지는 남부 ‘양곤’과 북부 ‘만달레이’나 수도는 중부 ‘네피도’로 이전됐다. 한국이 박정희(1961-79) 정부 독재에도 경제개발로 급속 성장해 산업화를 이루었으나 미얀마는 천연가스·원유 등 엄청난 자원에도 산업시설 국유화 등 사회주의인데다 중립외교에 따른 고립 및 군부정권 부패·무능, 민주화 유혈진압 및 소수민족 반군 저항과 살육으로 낙후됐다. 중국은 미얀마 자원 확보와 공산품 수출 때문에 눈독을 들여왔다. 우라늄 등 광물이 엄청 매장됐고, 비취 원석은 세계 90% 이상 매장됐다. 막대한 자금을 쏟은 중국은 미얀마에서 엄청난 이득을 챙겨왔다.

‘중국’은 ‘반군’과 ‘소수민족’을 지원해 ‘군부정권’과 적대관계였으나 위기감을 느낀 군부정권이 손을 내밀자 돌변해 반군과 손을 끊고 군부와 손을 잡았다. 군부정권은 ‘로힝야족’ 이슬람교도를 토벌했고, 중국도 국내 가장 넓은 성省인 신장 위구르자치구 이슬람교도를 탄압하면서도 비취 원석 때문에 북부 로힝야족 무슬림을 환대하는 이중적 태도 등 군부와 손을 잡으면서도 이익에 따라 표변했다. 군부정권과 로힝야족 등 소수민족을 싫어하며 민주화를 원하는 ‘미얀마인’은 중국이 이들을 지원하자 14일 중국계 공장 방화도 이런 민심이 작용됐다.

독립영웅 미얀마 국부 ‘아웅산’ 장군 딸인 ‘아웅산 수치’는 45년 양곤에서 태어났다. 15살 때부터 수치는 어머니가 대사였던 인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다. 영국인과 결혼해 아이 둘을 키우는 평범한 여성이던 그녀가 민주화 투사로 부상된 계기는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1988년 4월, 30년 만에 미얀마를 찾게 되면서다. 88년 8월 8일 ‘8888 민주화 운동’을 겪으며 군부에 수천여 명이 살해되는 참상에 영국으로 가지 않고 민주화에 합류한다.

오랜 가택연금 등으로 민주화 상징, 수치는 2010년 11월, 연금이 해제됐고, 2015년 재·보궐 선거에 출마해 하원의원이 됐으며 야당인 민족민주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의장이 돼 군부에 맞서는 상징 정치인이다. 2015년 11월 압승해 수치는 국가자문역 겸 외무장관이 됐다. 군부정권은 외국인이 배우자이거나 외국 국적 자녀를 둔 국민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도록 헌법을 바꿔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특히 헌법에 비상사태 시 정부권한이 군에 넘어간다는 조항도 있어 쿠데타 명분까지 있다. 수치 고문은 2015년 탄생한 민주정부에 위협적인 군부를 완전 청산치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다가 쿠데타를 자초했다.

NLD는 작년 11월 총선에서 전체 선출의석 83.2%를 차지해 문민정부 2기가 탄생되는 듯 했으나 2월 1일, “총선부정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는 군부 쿠데타로 ‘민 아웅 흘라인’ 사령관에 정권이 넘어갔다. NLD 압승으로 개헌이 우려되자 쿠데타를 재연했다. 수치 고문과 정부인사는 연금·구금되고 이후 민주화 시위로 사망자만 200여 명에 달한다.

YS가 1993년 2월 집권 직후, 문민정부가 열렸으나 전두환·노태우에 추종했던 ‘하나회’ 중심 군부는 그대로였다. YS는 집권 직후, 1980년 신군부 공신이던 육참총장 등을 즉시 교체했다. 수방사령관·특전사령관에 이어 군단장·사단장까지 하나회 장군을 무차별 거세했다. 취임 반년 만에 영관급까지 하나회를 완전 거세했다. IMF 국가부도 실정에도 수치 고문과 달리 군에서 하나회를 제거해 민주화 초석을 다졌다는 점은 대단한 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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