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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이제니의 ‘너는 멈춘다’ 해설

  • 입력 2021.06.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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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멈춘다 / 이제니

  

  너는 멈춘다. 횡단보도 앞에서. 철 지난 시계탑 앞에서. 사라져가는 계절의 마음 앞에서. 너는 멈춘다. 수정할 수도 있었던 틀린 맞춤법과 건너 뛸 수도 있었던 띄어쓰기와 다시 되돌아오는 긴 한숨 앞에서. 너는 멈춘다. 지나간 복도는 침울하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어둠을 가리키고 있고. 선택지 없는 방향성만을 제시하고 있고. 계절은 바뀐다. 계절이 바뀌듯 지나간 마음도 바뀐다. 지나간 마음을 바꾸면 조금은 더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너는 멈춘다. 지나간 여름의 이파리들 앞에서. 쓸모를 찾아가는 사물들 곁에서. 탁자는 비어 있다. 저녁 해가 기울어가며 만들어내는 그림자 그림자들. 오래 전에 들었던 가슴 아픈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쓸모없음을 상기시키는 어두운 도형 하나가 문득 제 그림자를 바꾼다. 너는 다시 멈추어 선다. 그러니까 어제 너는 불 꺼진 병실 침대 위에 누워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 아침에 너는 빛이 쏟아져 내리는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서 있다. 너를 멈추어 서게 하는 힘. 너를 멈추는 것으로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 너무 많은 빛이 네 눈동자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너는 마른세수를 하듯 두 손 가득 빛 그물을 떠서 얼굴을 문지른다. 오래 전 두고 온 어둠이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고. 열리지 않는 창문 너머로 새로운 빛이 내려앉는다고 생각할 때. 바라보지 않으면서 바라보는 눈을 가진 고양이들처럼 거리거리마다 관대한 사람들이 걸어가고. 삭제되지 않는 방식으로 삭제되는 어제의 문장들. 한 줄 두 줄 써내려간 문장들 위로 부드럽게 붉은 줄이 그어질 때. 등지고 누웠던 너의 뒤편으로 어제의 신음소리 다시 들려오고. 이제 너는 비로소 너 자신이 되었으므로. 처음으로 너는 한 발 제대로 멈추어 선다. 비로소 너는 사람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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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지난 주말, 해가 지는 초여름 풍경 속에 가만히 서있었습니다. 봄과 여름 사이에서 잠시 멈춘 채, 남보다 조금이라도 앞서려고 애쓰느라 고장 난 몸과 마음에 정지신호를 넣었습니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저녁 해가 기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풀과 나무 사이에서 어두워지는 일은 신선한 체험이었습니다. 쉬지 않고 질주만 한다면 사람이든 차든 순식간에 연료가 바닥날 것입니다. 무한경쟁의 시대, 무한질주의 무자비함에서 잠시 벗어나 스스로에게 휴식을 줘보면 어떨까요? 나와 남에게 조금 너그러워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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