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流配) / 우대식
오늘날에도 유배라는 것이 있어
어느 먼 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벌을 받았으면 좋겠네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빼앗겨
누구에겐가 온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지난 신문 한 쪼가리도 아껴 읽으며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 웅크리고 앉아 먼바다의 불빛을 오래 바라보고 싶네
마른반찬을 보내 달라고 집에 편지를 쓰고
살뜰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교육을 걱정하며
기약 없는 사랑에 대해 논(論)을 쓰겠네
서슬 위에 발을 대고 살면서
이 먼 위리와 안치에 대해 슬픈 변명을 쓰겠네
마음을 주저앉히고
서로 다른 신념을 지켜보는 갸륵함을 염원하다 보면
염전의 새벽에 어둑한 불이 들어오겠네
바닷가의 수척한 노동과 버려진 자의 곤고함을 배우다
문득 얼굴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물속에서 발견하면
삼박 사일을 목 놓아 울겠네
며칠 말미를 낸 그대가 온다면
밥을 끓이고 대나무 낚시를 하며 서로의 글을 핥고 빨겠네
글이란 무섭고도 간절하여 가시나무를 뚫고
천둥처럼 울릴 것이라 믿고
그대의 글을 읽다가
온통 피로 멍울진 내 혓바닥을 보겠네
유배의 길에 떨어져 흩어진 몸을 살뜰히 아껴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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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현대인은 결핍이 없어서 불행합니다. 우리는 상대가 지구 반대편에 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굴을 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이기는 편리함을 가져다 준 대신 기다림이라는 낭만을 앗아갔습니다. 얻는 게 있으니 잃는 게 있는 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가끔씩은 고지서가 아닌 손편지를 우편함에서 만날 때의 그 기분이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빼앗겨/ 누구에겐가 온 편지를 읽고 또 읽고” 할 수 있다면, 그래서 글이 “무섭고도 간절하여 사시나무를 뚫고” 한 줄 한 줄이 “천둥처럼” 울릴 수 있다면, 내면으로 들어가 느리고 무겁고 진지한 것들과 한 시절 함께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