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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송재학의 ‘황비창천명경’ 해설

  • 입력 2022.05.3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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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창천명경* / 송재학

 

  황비창천의 거울이 별이 되기 위해 바다에 잠길 때 서쪽 노을의 아랫도리마저 뚝뚝 뜯겨나갔다 삼족오와 달이 서로 애모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까마귀는 옛 조선에서 날아오매 해가 잠깐 환해져서 금오라고도 불렸다 그믐이 되면 달은 계수나무와 토끼의 숨결까지 억눌렀다가 아미월에 불러 다시 한 달 치의 우거를 세운다 용은 삭망의 바다를 삼켰다가 삭망에 바다를 토해낸다
  물고기를 잡으면 내장을 씻고 사슴을 잡으면 피부터 뽑아낼 일, 삿대를 잡은 사공이 큰 칼로 바다에 넓은 칼질을 했다 일만 마리의 물고기들이 지나가는 손돌목 물결 위에 푸른 배 그림자가 대자로 누웠다 배 아래가 평평한 조운선이었기에 키잡이 초공(梢工)이 쉬이 방향을 잡고 수수(水手)와 격군(格軍)이 도와 세곡을 싣고 합포 석두창에서 개경 경창까지 천 리 물길을 단숨에 열었다 면면 물굽이마다 교룡이 물터를 선점하고 비늘을 떨구었다 물의 눈썹 자욱이 근심을 없애는 우식악무늬를 거울에 돋을새김할 때 물길이 본받고 누누 고요하기만 했을까 남쪽 바다 서쪽 바다 먼바다 처처에 꽃내음 같은 황비창천의 율려를 헹구었지만 파도가 종종 기운을 뱉어내어 마음이 서늘하기만 했다 동경마다 정성을 채우고 조운에 부정이 없어야 바다가 기운을 넙죽 받았다 개경 나루의 일천 횃불이 조운선이 오기 사나흘 전에 모두 켜졌다

 

*개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청동거울. 황비창천(煌丕昌天)은 이 거울에 새겨진 명문으로 밝게 빛나는 창성한 하늘을 뜻한다. 고려에는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동경을 바다에 던지는 풍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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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동경(銅鏡)은 유리로 만든 거울이 보급되기 전에 사용되었던 거울입니다. 뒷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 장식했습니다. 황비창천명경은 황비창천이라는 글자와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를 건너는 배 한 척이 새겨져 있는 거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언제 갑자기 성난 짐승으로 돌변할지 알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동경을 바다에 던져 안전한 항해를 기원했다고 합니다.

황비창천의 거울이 별이 되기 위해 바다에 잠길 때서쪽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고 전설 속의 삼족오가 달을 향해 날아올랐다고 합니다. 그렇게 동경은 천년을 누워 물고기의 내장을 씻고 사공이 바다에 칼질을 해대는 것을 견뎠습니다. 천년이 내내 고요하기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때로 성난 파도에 마음을 다치기도 하고, 때로는 용 무늬를 새긴 크고 푸른 배의 그림자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오래전, 조상들이 안전을 비는 마음을 동경에 새겨 바다에 바친 덕분에 오늘도 배들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다니는 게 아닌가 상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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