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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고희’ 장군, 서거 4백주년을 맞아!

  • 입력 2015.09.1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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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이나 가능한 君 칭호를 4대나 계속 받은 중심인물인 영성군 고희 장군 서거 4백주년을 맞았으나 기념사업이나 행사 등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

영성군은 부안읍 성남리 죽내촌(봉덕리 내갈부락)에서 1555년에 무과에 급제했던 제원군 장남으로 1560년 출생했다. 영성군 조부인 공조참판 고세호도 1526년 무과급제해 교지가 보물 739호인데 부친인 제원군도 무과급제로 병조판서와 제원군 작위를 받았다. 영성군은 임란에 나라를 구하고자 선조를 호위하며 누란위기를 극복한 인물이다. 1584년에 무과급제해 1592년 4월 임란발발로 선전관으로서 피난 가는 선조를 호위한다.

임진강을 선조를 업고 건너며 개경에서 선조 명령으로 충청. 전라관찰사 등을 만나러 왜군이 그득한 한양과 경기도를 거쳐 내려온다. “군사(의병)를 모집하라”는 왕명 전달을 위한 징병사다. 3부자와 동생 및 딸 등 5명이 목숨을 잃은 고경명과 김천일 등 호남의병의 도화선이 됐다.

전라감영에 어명을 전달하고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자식이 대수냐”며 부안에 들리지도 않고 선조가 있던 북으로 향한다.

선조를 호위하며 대동강을 건너다 왜군의 칼날에 오른쪽 귀를 잃는다. 선조는 궐위(임금이 없게 되는 상황)에 대비해 광해군과 분조(조정을 나누는 일)를 한다.

영의정 등 많은 신하와 장졸은 젊은 광해군을 따르거나 도망간다. 영성군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때가 위태로우니 어찌 목숨을 아낄쏘냐?”라는 ‘主辱臣當死 時危命易輕’이라는 許身辭(죽음을 각오하는 시)를 남겼다.

영성군은 왜병과 수많은 민란 등을 넘기고 선조와 함께 임진강. 대동강. 청천강을 건너 의주까지 가야 했다. 1593년 10월 선조와 함께 한양으로 돌아왔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봉되고 영성군에 봉해진다. 영성군 고희 영정과 선조가 내린 유교서는 보물 739호다. 서예의 대가, 한호(韓濩: 한석봉)의 글씨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부안으로 낙향한다. 1615년 12월 1일 영성군이 서거하자 호조판서로 추증되고 예장禮葬(국장)하고 석불산 사방십리를 사패지로 하사받는다. 석불산에 묘소가 있다.

영성군 아들, 고홍건은 이괄의 난 공로로 영원군에 봉해졌고 훗날 병자호란에 대가를 호위하며 남한산성에서 싸웠으며, 손자인 고두황은 영해군 작위를 받았다.

후손 중에 수많은 무과급제자를 배출해 나라를 지키려는 일념이 면면히 내려왔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온 몸을 바친 인물의 업적을 기리고 사표로 삼아 애국애족 정신을 선양함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임란공신, 서거 4백주년을 맞고도 부안군과 전북도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현재 효충사와 영당, ‘1522년 참판공 고세호의 교지부터 고정상에 이르는 1894년(고종 31년) 유물까지’ 12대 372년간의 유물 20종 215점이 보물 제739호로 보관 전시되는 유물관만 남아 있다. 민족혼과 애국애족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고희 장군 동상과 왜란 및 호란 등 전쟁체험관 건립, 석불산 주변에 단풍이나 벚꽃 식재, 청호교차로~석불산~송림~장신교차로까지 도로연결 등 기념사업에 관심을 쓸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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