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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진해농악의 뿌리를 찾아서-조천풍물사를 통해 바라보다

  • 입력 2016.01.07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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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의 농악은 왜적의 침입과 각종 질병, 재앙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려는 숭고한 의식으로 메구, 메굿으로도 불리며 전승되어 오고 있다. 진해농악은 경상북도 현풍과 청도에서 유입된 풍물이 웅천현의 풍속과 혼합되면서 지금의 풍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영남농악의 문화권 중에서도 현풍과 청도농악에 보다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조피천풍물의 시작은  진해(구 웅천현)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14세기에서 16세기 후반까지는 인구수가 감소했으나, 조선 태종 7년(1407년) 제포(내이포)를 개항하면서부터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외지인들의 급속한 유입이 있었고, 이들을 위한 식량 증산이 필요했다. 경화동 서북지역(구 경화2가동)에 현종 14년(1673년) 경상북도의 현풍과 청도에서 밀양박씨의 일가와 친척 및 가솔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왔는데, 밀양박씨조천문중에서는 풍물을 비롯한 각종 민속들도 이 때 함께 유입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주민들은 밭과 구릉지가 대부분이었던 땅을 계곡에서 끌어들인 물로 개간했다.‘곡식을 수확할 때 만들어진 껍질(造皮)이 온 내(川)를 하얗게 덮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인 조피천리(造皮川里)에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고 문중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풍물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150여년을 이어온 풍물은 1826년 11월(음) 문중에서 발생한 종손가의 실화(失火) 이후 친척들이 떠나면서 차츰 규모가 축소되었고, 갑오개혁(1894)의 신분제 철폐로 가솔들마저 떠나면서 풍물을 행할 인력이 부족해 1896년 활동을 중단하게 됐다.  당시 문중의 집사 박무창(朴武昌. 1846-1907)은 문중의 주요 문서들과 함께 관혼상제와 풍속 등의 자료들을 정리해 사랑채의 광에 보관해 둠으로써 훗날의 사용에 대비했다.

조천풍물의 재창설은 1825년경 조피천리가 조천리로 지명이 변경되면서 바뀐 이름이다. 1907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진해 군항 건설로 인해 자신의 주거지에서 강제로 쫓겨난 주민들과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다수의 사람들이 1914년까지 경화동 신시가지로  유입되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조천마을에 정착했다.

1925년 초에 조상을 모시기 위해 일본에서 귀국한 박유화(朴有化 1865-1949)는 10월 2일(음 8월 15일)에 그의 집(경화동 1460번지)에서 문중 대표 3명과 문중사업에 대한 심도 깊은 의논했다. 토의 결과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민족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하는 것이 시급하다는데 뜻을 같이 하고 문중의 미풍양속을 우선 복원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11월 중순에 그의 부담으로 네 아들 등 5명을 마산으로 보내어 풍물도구와 가마 등 혼례용품 일체를 주문 제작 및 구입하게 했다.‘지신밟기’와 ‘치기나칭칭나네’의 사설을 보관하고 있던 박소도(朴小道 1904-1956)는 12월에 조천마을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희망자를 모집했고, 그의 집(경화동 1256번지) 사랑채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제작하고 기능보유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틈틈이 연습을 했다.

1926년 2월 15일(월)(음 1월 3일) 박소도의 집에서 명맥이 끊긴지 약 30년 만에 풍물패를 재창설하였고, 박유화의 회갑일(2월 19일. 음 1월 7일) 잔치자리에서 풍물의 첫 발표를 하며 조천풍물의 재창설을 알렸다.

이후 해마다 1월 3일(음)에 모여 2일간 풍물용품을 정비한 다음 5일(음)부터 대보름(음 15일)까지 약 11일간 풍물(지신밟기)을 행했다. 진해면민줄다리기와 같은 지역의 주요 행사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행암리부터 시가지의 조선인 거주 전 지역을 대상으로 걸립(乞粒)의 형태로 진행했다. 주인은 보답으로 한 말 가량의 곡식을 내어놓았다.

6.25전쟁이 끝나고 풍물을 이끌던 박소도의 사망 후 군에서 제대한 박덕수(朴德守 1931-2009)는 비슷한 나이의 조천마을 출신 청년들로 1956년부터 상조계 형식의 조천재향친목계(造川在鄕親睦契)를 조직하고 풍물을 이어받아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60년대 이후 조천풍물을 모방한 타지역 풍물패의 창설로 인한 활동 영역 축소와 계원들의 노령화로 2004년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지역의 혼례와 상례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조천풍물은 1960년대 이후 경화3가동(현 병암동)을 비롯한 진해의 전 지역은 물론 창원의 상남면까지 확산되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조천풍물 재창설 90주년이 되는 2016년을 앞두고 조천풍물의 재조명과 보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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