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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고재홍 기자

<칼럼> 선화공주 사탁선화일 가능성!

  • 입력 2017.10.18 16:04
  • 수정 2017.10.1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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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일보=호남]고재홍 기자='사탁'이나'사택沙宅=砂宅', 혹은 '사沙'씨라는 같은 성씨를 가진 왕족에 버금가는 귀족의 상호관계나 왕권과의 역학구조도 관심이다. 왕은 '부여夫餘'씨가 독점했으나 사비시대‘백제 8족’은 사沙·연燕·협·해解·진眞·국國·목木·백씨다. 왕족인 부여씨와 해·진씨는 부여계로 북쪽에서 내려온 귀족이고, 사·연·백씨는 남부토착 금강유역 마한계다. 8족 으뜸인 사씨는 삼국사기 동성왕(484) 기록에 내법좌평 사약사沙若思가, 일본서기(543)에 상좌평 사탁기루己婁가 나와 사비천도 세력으로 보인다. 639년 무왕 장인, 좌평 '사탁적덕積德', 일제가 부여에 신궁을 세우려 쌓았던 돌무더기에서 해방 후 발견돼 역사책에 나오는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 의자왕 14년(654)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지난날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내용을 남긴 대좌평 '사택지적智積',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자왕과 함께 포로가 된 대좌평 사택천복千福, 당나라에 압송됐다 웅진도독부 요직을 맡았던 사택손등孫登, 일본으로 달아났다 671년 대금하大錦下라는 벼슬을 받았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사택소명紹明, 익산천도를 주장할 때 일부가 내세우는 관세음응험기에 나오는 사문발정沙門發正, 백제 무왕 28년(627) 신라 국경 두 성을 함락시킨 사걸沙乞 장군 등 무수하다. 왕족인 부여씨나 백제8족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백제멸망 때 항거하다 도륙 당했거나 일본에 망명하고, 당나라로 압송됐거나 성을 바꿨기 때문이다.

'사탁적덕'과 관련, 주목할 인물이 '사택지적비'를 남긴 사택지적이다. '적덕積德과 지적智積'은 똑같이 '積'자가 있고 "지혜와 덕을 쌓으라."는 의미다. '선화善化'처럼 불교색채가 짙고 10여년 시차를 두고 왕의 장인인 좌평과 대좌평을 역임해 부자나 형제간일 수 있다. ‘지적‘은 일본에 다녀온 후 대좌평까지 올랐으나 관직에서 물러나고 비를 남겼는데 백제 유일한 금석문이다.

선화공주가 삼국유사 외에 기록이 없고, 고구려·백제·신라 등 한국과 중국 및 일본 사서 등을 고려하고, 집권 초 백제군 4만명이 몰살한 아막성 전투(602), 사리장엄 기록, 당시 국내외 정치상황 등으로 볼 때 사탁왕후가 선화공주일 가능성이 매우 짙다.

"왕의 서자인 서동은 훤칠하고 포용력이 대단한 것을 무기로 좌평 사탁적덕 셋째 딸이 '미염무쌍'이라는 것을 듣고 금강을 따라 사비(부여)로 간다. 서동요를 퍼뜨려 사탁선화를 차지한 서동은 '흙처럼 쌓인 금'을 하룻밤에 지명법사 도움으로 왕을 옹립하거나 폐위시킬 정도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갖춘 사탁적덕에 보내 인심을 쌓고 결혼에 성공한다. 사탁가문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어릴 적 애환과 첫사랑이 서린 익산에 자주 들린다. 지명법사가 있는 사자사로 가다 사탁왕후는 가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해 수십 년에 걸쳐 미륵사를 세우고 사리호와 봉안기 등을 안치한다. 늙은 대왕의 건강을 기원했으나 무왕은 2년 후 죽어간다."는 것이 진실이 아닐까? 텃밭인 익산에 천도를 꿈꾸었으나 실현치 못한 것 같다.
 
의자왕(641~660) 즉위 후 '일본서기' 642년에 "모후인 ‘국주모國主母(나라 주인인 어머니)’가 죽자 왕자 '교기'를 비롯 그 여동생과 관리 40여명을 섬으로 추방시켰다."는 내용의 ‘국주모‘가 정실왕후 사탁선화였으나 ’아들이 없어(?)‘ 후궁 소생인 의자왕이 40세 가까운 나이에 태자로 책봉(632)된 것은 아닐지? 사탁가문 위세에 눌려 태자 시절, “효도로 섬기고 형제와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으나 집권 직후, 사탁왕후가 죽자 사탁가문을 추방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백제가 망하고 태자 부여융과 당나라로 끌려갔고, 백제부흥 등 치열한 싸움과 이후 전란에 사서는 소실되고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말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는 사리장엄 봉안(639) 641년이 지난 1280년(충렬왕 6년) 전후였기 때문에 구전 밖에 없어 신라 선화공주로 기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봉안기 안치 21년 후 멸망한 ‘백제 좌평佐平’도 ‘신라 진평眞平’으로 둔갑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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