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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기고
  • 기자명 최형심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각시푸른저녁나방 / 권규미

  • 입력 2018.01.22 13:42
  • 수정 2018.01.2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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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푸른저녁나방

- 권규미

 

달을 한 마리 열대어라 믿는 나라가 있었다 모래바람 흩뿌리는 별들을 걸어와 마른 뼛조각 흔드는 나무들이 자랐다

'푸른'이란 어느 적막의 다정한 허사(虛辭)였다 실패한 마술사의 생생한 수염이 빗방울에 매달려 동그란 시간의 발을 생각했다 고삐에 매인 염소처럼 밤은 자꾸만 되돌아왔다

그게 무슨 역이었는지 모르겠다 끝없이 갈라지는 길 위로 하염없이 물을 긷는 소녀가 있었다 찬물 한 모금,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각시푸른저녁나방이 날개를 접고 제 가슴 안쪽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있다

푸나무 한 짐의 아버지처럼, 슬하의 가난을 끌고 주춤주춤 기척도 없이 안개는 차고 상한 모서리마다 수런수런 날개가 돋았다

한때 나는 추운 나라의 나방이었다 때때로, 한기(寒氣)처럼 쏟아지는 저녁이 있다

 

 

가난한 유년은 작가에게는 큰 축복이자 재산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가슴 안쪽의 어둠을 들여다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고통이다. “슬하의 가난을 끌고” 세상의 “차고 상한 모서리마다” 다쳤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기(寒氣)’가 ‘쏟아’진다. 아름다운 푸른 날개를 가졌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채, 어두운 곳만 디뎠을 사람……. 그의 인생에 붙은 ‘푸른’이라는 단어는 “다정한 허사(虛辭)”에 불과하다. 오늘밤도 “모래바람 흩뿌리는 별들을 걸어와” 우리의 “마른 뼛조각”을 흔들고 갈 고단한 아버지를 가진 우리는 모두 각시푸른저녁나방의 후예들이다.

<최형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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