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읽는 아침]]고경숙의 ‘첩실기(妾室記)’ 해설

  • 입력 2019.06.25 03:51
  • 댓글 0

첩실기(妾室記)

-고경숙 

 

식구면서 가족이 아닌 동거가 시작됐다

음습한 곳에 난 종기처럼

주인영감은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만

그녀를 풀어보았다

침목처럼 누워 바라보는 별빛이

흔들흔들 화물차 몇 량을 보내고

식구면서 가족이 아닌 아이가 태어났다

조용히 숨죽이는 호흡 아래

철로에서 몇 차례 넋을 잃었다

바람에 동승하고 싶었다

슬찌끼미 같은 안채의 내방이

그 집에서 그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명확하게 선 긋고 가는 밤이면

감나무 이파리도 후둑거리며

등짝을 쳤다

서러운 너머의 것들은 모두가 한통속이다

식구면서 가족이 아닌 아이가

분 젖통을 찾아 그녀를 풀던 새벽녘,

영감 대신 화물차 한 량 온몸으로 받으며

침목처럼 그녀가 거기 누워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식구이면서 가족이 아닌 존재”처럼 서러운 게 또 있을까요? 전통사회에서 첩이란 “음습한 곳에 난 종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던 치부였습니다. “식구이면서 가족 아닌 존재”가 역시 축복받지 못하는 존재인 “식구이면서 가족 아닌 아이”를 힘겹게 재생산해내는 풍경은 마음을 쓰리게 합니다. 첩살이는 “조용히 숨죽”인 채 바닥에 엎드려 온몸으로 “화물차”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삶입니다. “첩실”이란 제3자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잉여였겠지만 여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더없는 결핍이었을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어 첩 제도는 사라졌지만, 경쟁에 밀려 세상으로부터 잉여 취급을 받아야 하는 이들의 삶이 과연 첩살이와 얼마나 다를까요? “서러운 너머의 것들은 모두가 한통속이다”라는 시인의 말은 아마도 세상 모든 약자에게 건네는 위로일 것입니다.

 - 시인 최형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놓치면 후회할 이시각 핫이슈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