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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박지웅의 ‘흰색의 역사’ 해설

  • 입력 2022.11.1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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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의 역사 / 박지웅

 

   늦가을 공중 흰 숲에 파랗고 파르스름한 길 한 가닥 어림쳐 시오리가량 열리더니 백록(白鹿) 하나 걸어 내려왔다 녹명(鹿鳴)으로 무리를 부르자 불현듯 구름을 이루는 기러기 백리(白鯉), 흰긴수염고래, 흰색을 까마득히 여미며 몰려드는 흰 피를 가진 생물들, 시름시름 무거워진 공중이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비단산 등성이에 첫 눈을 소복소복 내려놓았다 그 흰색의 하류에 갓 젖을 뗀 어린것이 한두 걸음 다가가서는 눈의 새순을 똑똑 뜯어먹는 것이었다 이런 날 천상과 지상은 구천(九泉)을 돌던 영혼과 첫눈을 맞바꾸는데 바람은 또 어디서 흰 관을 짜서 밀고 들어오는지 겹잎을 이룬 화문(花紋)이 구름숲에 내내 어리었다 저 흰색들의 빈소에서 가볍게 수백 번 소복을 움켜쥐던 바람은 추스르는 듯 허물어지는 듯 자작과 북극성 사잇길에 지새우는데 어디로 가는가 흰 눈썹 가진 꽃을 받아들고 웃던 사람아, 목련꽃을 젖병같이 입에 물던 영혼아, 이 모든 흰 것의 가장 깊숙한 별을 가리키던 내 어두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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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를 색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색이 흰색일 것입니다. 흰색은 모든 소멸하는 것들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고, 모든 시작하는 것들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합니다. “늦은 가을” “무거워진 공중이허물어져 내리면 세상이 온통 흰색으로 뒤덮이게 됩니다.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모든 과정을 마무리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무()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내세를 믿었던 한국의 전통적인 상복이 흰색이라는 것도 이러한 순환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승의 애증과 욕망을 하얗게 지우고 저승에서건 다음 생에서건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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