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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박연준의 ‘유월 정원’ 해설

  • 입력 2023.06.14 14:34
  • 수정 2023.06.1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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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정원 / 박연준

 

바보를 사랑하는 일은 관두기로 한다
아는 것은 모르는 척
모르는 것은 더 크게 모르는 척,
측립(側立)과 게걸음은 관두기로 한다
보이는 것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않은 채
실제를 감지하기로 한다
행운도 불행도 왜곡하지 않기로 한다
두려움에 진저리 치다
귀신이 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다
마음을 김밥처럼 둘둘 말아 바닥에 두지 않기로 한다
먹이가 되어 먹이를 주는 일,
본색을 탈색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다
부수는 건 겁쟁이들의 일,
집을 부수는 대신 창문을 열기로 한다
두 시간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고양이가 되어 사냥하고 할퀴기로 한다
발톱을 쭉쭉 빨며,
함부로 피어나지 않기로 한다
오뉴월은 엎드려 지나고
팔월 즈음 푸르게, 해산(解産)하기로 한다
뻗어 나가는 건 아이들뿐,
누추한 어른들은 삽목하기로 한다
한 그루 두 그루 세다
남은 건 버리기로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자에게선 아름다움을 빼앗고
무지렁이로 골방까지 걸어가는 사람에게
신발을 골라주기로 한다
(정확함은 문학의 신발 치수!)
맞는 신을 신고 걸어가는 노인들을 골라
사랑하기로 한다
오른쪽으로 행복한 사람과 왼쪽으로 불행한 사람이
한집에서 시간을 분갈이하는 일,
뒤척이는 화분에 물을 주기로 한다
진딧물도 살려주기로 한다
영혼을 낮은 언덕에 심고
이제부터 작은 것에만 복무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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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유월은 살아 있습니다. 사방에서 시뻘건 장미가 생명력을 자랑하며 가시를 세웁니다.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들꽃이나 잡초들도 “게걸음”으로 뻗어 나갑니다. 유월에는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아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화분”에 갇힌 씨앗도 물만 있으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창문을 열고 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낮은 언덕에” 심을 수 있는 시절입니다. 생명력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어 애쓰지 않아도 모두가 아름다울 수 있는 시절, 유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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