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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천서봉의 ‘K의 부엌’ 해설

  • 입력 2023.08.1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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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의 부엌 / 천서봉

 

 이제, 불행한 식탁에 대하여 쓰자 가슴에서 울던 오랜 동물에 대하여 말하자

 가령 상어의 입속 같은 검은 식욕과 공복의 동굴 속에서 메아리치는 박쥐의 밤들

 들개의 허기, 늪처럼 흡입하는 아귀의 비늘과 그 비늘이 돋는 얼굴에 대하여 말하자

 하여 그 병의 딱딱한 틈에서 다시 푸른 순(筍)을 발음하는 잡식성의 세계사에 대하여

 말을 가둔 열등한 감자와 그 기저의 방 속에서 끝내 다복할 주검에 대하여 말하자

 기어이 모든 숨을 도려내고야 말, 아름다운 칼들 가득한 K의 부엌에서

 딱딱하게 굳어 기괴한 신탁의 소리를 내고야 말 우리의 혀에 대하여 말하자

 간이나 허파 따위를 담고 보글보글, 쉼 없이 끓어오르는 냄비 속 레퀴엠에 대하여

 말하자, 우리가 요리하고픈 우리의 부위, 왼손이 끊어내고 싶던 그 왼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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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먹는다는 것은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그만큼 절박한 일이기도 합니다. 식물의 잎이든 돼지 뒷다리든 남의 살을 삼키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에, 살아있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내면에 엎드린 야만을 마주해야만 합니다. “상어의 입속 같은 검은 식욕”이 공복을 만나는 순간 “들개의 허기”가 깨어나고, 접시 위 토막 난 어떤 육신은 “모든 숨을 도려내고야” 굶주린 인간 앞에서 “마침내 기괴한 신탁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한때 뜨거웠을 누군가의 심장이 끓고 있는 우리의 부엌은 말하자면 원죄의 현장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가슴 깊은 곳에 잠재울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품은 채 살아가야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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