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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고재종의 ‘고요를 시청하다’ 해설

  • 입력 2023.08.2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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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를 시청하다 / ​고재종

초록으로 쓸어놓은 마당을 낳은 고요는

새암가에 뭉실뭉실 수국 송이로 부푼다

날아갈 것 같은 감나무를 누르고 앉은 동박새가

딱 한 번 울어서 넓히는 고요의 면적,

감잎들은 유정무정을 죄다 토설하고 있다

작년에 담가둔 송순주 한 잔에 생각나는 건

이런 정오, 멸치국수를 말아 소반에 내놓던

어머니의 소박한 고요를

윤기 나게 닦은 마루에 꼿꼿이 앉아 들던

아버지의 묵묵한 고요,

초록의 군림이 점점 더해지는

마당, 담장의 덩굴장미가 내쏘는 향기는

고요의 심장을 붉은 진동으로 물들인다

사랑은 갔어도 가락은 남아, 그 몇 절을 안주 삼고

삼베올만치나 무수한 고요를 둘러치고 앉은

고금(孤衾)의 시골집 마루,

아무것도 새어나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가

초록 바람에 반짝반짝 누설해놓은 오월의

날 비린내 나서 더 은밀한 연주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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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고요는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자주 모습을 바꾸어 우리 앞에 나타나곤 합니다. 바람이 쓸고 간 마당에 고여 있기도 하고, 샘가에 수북한 수국 송이로 피어나기도 합니다. 감나무나 덩굴장미에 머물다 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멸치국수를 소반에 내놓으시는 어머니가 되기도 하고 마루에 앉아 국수를 드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되기도 합니다. 삼베 올처럼 무수한 고요로 엮어 만든 기억 속의 고요가 낡은 툇마루에 나앉습니다. 기억 속의 오월, 그 맑고 깨끗한 고요의 질감이 유리알처럼 반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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