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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진은영의 ‘이 모든 것’ 해설

  • 입력 2023.08.3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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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 /진은영

 

비눗방울 하나가 투명한 기쁨으로 무한히 부풀어 오를 것 같다

장미색의 궁전이 있는 도시로 널 데려갈 수 있을 것 같다

겨울과 저녁 사이

밤색 털 달린 어지러운 입맞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광활한 사랑의 벨벳으로 모든 걸 가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배고픈 갈매기가 하늘의 마른 젖꼭지를 심하게 빨아대는 통에

물 위로 흰 이빨 자국이 날아가는 것 같다

 

이 도시는 똑같은 문장 하나를 영원히 받아쓰는 아이와 같다

판잣집이 젖니처럼 빠지고 붉은 달 위로 던져졌다

피와 검댕으로 얼룩진 술병이 흰 비탈에서 굴러온다

첫 시집의 변치 않는 한 줄을 마지막 시집에 넣어야 할 것 같다

청춘은 글쎄…… 가버린 것 같다

수천 개의 회색 종을 달고서 부드러운 날개 하나

천천히 날아오르는 것 같다

 

가난한 이의 목구멍에 황금이 손을 넣어 모든 걸 토하게 하는 것 같다

초록빛 묽은 토사물 속에 구르는 별들

하느님은 가짜 교통사고 환자인 것 같다

천사들이 처방해 준 약을 한번도 먹지 않은 것 같다

푸른 캡슐을 쪼개어 알갱이를 다 쏟아버리는 것 같다

안녕, 안녕, 슬레이트 지붕의 부서진 회색 위로 눈이 내린다

내가 보았던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

달에 매달린 은빛 박쥐들의 날개가 찢어져 내리는 것 같다

 

 

____________________

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사랑에 빠지면, 등 뒤에 부드러운 날개 하나가 생겨나 가만히 서 있어도 날아오르는 것같은 기분이 들고 거짓말처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마법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순간만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벨벳처럼 따스하고 부드럽게 느껴지지요. 하지만 사랑이 떠나고 청춘마저 가고 나면, “장미색의 궁전대신 부서진 회색” “슬레이트 지붕아래 앉아 술병과 마주한 채 차고 시린 을 맞아야 합니다. “내가 보았던 모든 것이 거짓말인 것 같다고 중얼거리면서 찢어져버린 날개를 가만 만져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토사물같은 구질구질한 삶으로 다시 돌아와야 할지라도 에 다가갔던 그 기억은 가장 빛났던 순간으로 한 사람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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