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이혜영의 ‘밤의 푸가’ 해설

  • 입력 2023.09.13 18:17
  • 댓글 0

밤의 푸가 / 이혜영

​​

황혼 무렵 거대한 그 여자

밤나무 숲에 거꾸로 걸려 있네

기다리고 있네 깊고 서늘한

숨소리 맥박소리 온 숲을 울리네

높다란 밤나무 꼭대기에서

굵은 등걸 밑동으로

청 홍 황색 번득이는 비단뱀들

굽이치는 머리칼 속에

여자의 외눈이 숨어 있네

훔쳐보고 있네

천천히 견디고 있네

레바논 성전의 기둥처럼

단단하고 매끄러운 두 다리 사이로

보름달 둥싯 떠오를 때

귀에 익은 발소리 다가오네

길고 검은 손톱들 여자의

뱃가죽을 달게 찢고 있네

싱싱한 녹색과 자주색의 포도송이들

살진 잎사귀들 호랑무늬 나비들

푸른 벨벳빛 까마귀들이

자지러지는 여자의 몸에서

쏟아지네 하늘거리는 비단옷감들

붉은 고양이들이 뛰쳐나오네

황금 해골들 싯푸른 들개들

향기로운 몰약과 유향

무지개빛 성수가 솟구치네

여자가 깊어지네 울창한

미로들 강이 되어 흐르네

숲엔 텅 비인 여자 하나

깃발처럼 펄럭이네

환하게 켜 있네

거대한 빛의 강물이네

 

______________________

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원초적이고 난폭하며 야성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작품입니다. “숲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여인은 식물처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무력하고 수동적인 존재처럼 보입니다. “보름달”이 뜨자 “깊고 서늘한” 어둠이 여인 내면의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욕망을 깨웁니다. “비단뱀”과 “까마귀” “들개”로 상징되는 감추어둔 공격 본능이 살아난 것입니다. 점점 몸집을 불려 “거대한” 존재가 된 여인은 결국 “성수”를 다 쏟아내고 “텅 빈 여자”로 돌아옵니다.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이미지들이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생명력이 넘치는 작품입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놓치면 후회할 이시각 핫이슈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