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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함기석의 ‘혹시나 해서 말인데’ 해설

  • 입력 2023.11.30 13:23
  • 댓글 0

혹시나 해서 말인데 / 함기석

 

1

소개팅으로 시를 만나지 마라

불운이 너의 삶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거다

 

심심하다고 시를 술친구로 두지 마라

주사가 심해서 온갖 헛소리를 다 들어줘야 할 거다

 

외롭다고 잘생긴 시를 남자친구로 두지 마라

더 외로워져서 혼자 죽을 거다

 

달빛 내리는 밤, 시가 들려주는 기타소리에 혹하지 마라

엉킨 실타래처럼 사랑도 미래도 꼬일 거다

 

생일에 시가 안겨주는 장미 꽃다발에도 혹하지 마라

향기는 하루고 악취는 날마다 부활할 거다

 

특히 시와의 첫 키스를 조심하라

달콤한 미남마귀 입술에 취해 두 눈을 꼭 감으면

 

꼭 그때부터 헛것을 보게 되고

꼭 그때부터 안개 속을 떠도는 눈먼 새가 되더라

 

그리고 절대로 시와 동거하지 마라

벌거벗은 시의 알몸을 보면, 어휴~ 눈이 썩을 거다

 

아 이 겨울밤, 달은 밤의 노숙자다

지상에는 잠들 곳이 없어 춥고 어두운 하늘 떠도는

 

난 혹시나 해서 말인데 넌 역시나 해서

양의 탈을 쓴 고양이거나 살쾡이 운명이면 어쩔 수 없지

 

아 저기 골목 끝에서 시가 걸어오고 있다

그는 방금 오줌통에 빠졌던 취한 사내다 소개해줄까?

 

2

난 어젯밤에 오줌통에 빠졌던 그 사내다

아침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아 나는 또 그립다

 

함기석!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밤새 그렇게 나를 씹니? 아무튼 여긴 지하도다 나의 숙소

 

바깥으로 나가니 도로는 꽁꽁 얼어붙었고

강추위에 바지 속의 내 고추도 왕창 쪼그라들었다

 

찬장에 높게 쌓인 유리그릇처럼 턱은 덜덜덜 떨린다

공터로 가서 오줌을 누려고 바지를 끄르는데

 

손가락이 얼어서 나뭇가지처럼 딱딱해져서

꺼내기도 전에 줄줄 샌다

 

아 이게 인생이구나!

뭔가 꺼내기도 전에, 내 오줌에 내가 홀딱 젖는 것

 

그래도 난 다행이다 저자는 어쩌나

벨트 풀기도 전에 설사가 터진 저 불량품 건달 시인

 

혹시나 해서 말인데, 그 인간 시집 나오면

썩은 속 달래줄 보은 대추차나 한 대접 대접해줘라

 

아 저기 고층빌딩 위 살얼음 깔린 하늘에서

아침 해장술에 취한 신은 또 하루치의 햇살 기타를 퉁기고

 

아 저기 눈 덮인 광장 가득

빡빡머리 해는 떠오르고 새들은 또 햇빛을 물어다 나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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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시인은 직업별 연봉 통계에서 늘 최하위를 다투는 직업입니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시인의 막강한 경쟁자들입니다. 전업 작가, 그중에서도 전업 시인은 매일 빈곤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직업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시인이라는 직업이 꽤 화려하고 매혹적인지 많은 이들이 환상을 품은 채 시를 업()으로 삼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와 더불어 사는 삶은 경제적인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고통 그 자체입니다. 신춘문예 시즌입니다. 돈도 벌 만큼 벌었겠다, 사회적 지위도 높겠다, 이제 시나 써볼까 하는 분들의 연락이 잦아지는 때입니다. 그런 연락을 받을 때마다 씁쓸해집니다. 제가 세례를 받을 때, 신부님이 저에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종교가 제 인생을 꾸미는 또 다른 장식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시를 인생을 꾸미는 아름다운 장식품쯤으로 여기고 손을 대는 순간, 그것은 끝없이 살을 파고드는 족쇄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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