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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최규리의 ‘가슴을 달자’ 해설

  • 입력 2024.01.17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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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달자 / 최규리

 

  유리컵이 미끄러진다 깨진 조각들을 밟는다 발바닥이 서늘하다 신선한 감정은 가장 바보스러워서 좋았다 일어나 창문을 연다 흰 것을 숭배하는 자처럼 불온한 손을 내민다

  창밖의 아이들아, 너희들의 반항에 위선 따위는 없다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한다 한낮의 빛은 날카롭고 푸른 종소리는 폭풍을 걷어가지 못했지 오해의 속도는 굽이치고 어떤 노동보다 가파르다 발바닥에 흐르는 피는 나를 보호하지 못하고

  검은 가루가 떠다녔다 치열하게 눈썹을 떠는 오후에는 포도밭으로 가자 흰옷을 입고 춤을 추자 포도를 던지고 포도즙으로 샤워를 하고 붉은 향기로

  격렬하게 저항하는 어린 날을 데려와 기억을 재구성한다 유리컵이 떨어진다 누가 먼저 그랬냐고 다그치는 선생님이 있었지 싸우는 아이들도 선빵이 중요하다네 누구든 유리 조각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묻지 않는다 너무 쉬워 보여서 다 알고 있는 감정이라고 절대 베이지 않을 것처럼

  우리를 내려놓을 곳을 찾아 불면의 시간 속으로 피에 젖은 발등으로
  미끄러지는 언어에, 실패하는 대화에 가슴을 달자 언제나 따뜻하고 물렁한 엄마의 것처럼 푹신한 식빵에 얼굴을 묻고 촉촉한 이해의 결을 따라 얄팍한 입술을 대자
  
프시케를 소환하여 잠으로 가자 열등한 뇌에게 온기를 주자 게으르고 느림의 춤을

  절반의 발끝으로 꿀이 흐르는 가슴으로
  하얀 이불이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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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나이가 들어서 슬픈 일 중 하나는 세상에 더는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먹어 본 맛, 가본 곳 등등 익숙한 것투성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열정을 불태울 일도 감동할 일도 없습니다. 격정적인 감정의 폭풍에 휘말려 심신을 다칠 일이 없어 좋지만, 문제는 인생이 회색빛으로 변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반항에는 위선이 없다는 시인의 말처럼 격렬하게 저항하는 어린 날만큼 세상과 자신에게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익숙하고 안전한 것들 저편, “깨진유리 조각을 밟았다가 흐르는 피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 서늘…… 미숙했지만 치열했고 그래서 실패의 두려움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감동도 열정도 분노도 느낄 수 없어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라면 어린 날처럼 가슴을 열고 세상에 다가가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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