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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지르고 도망간 아들, 엄마는 "불 속에 아들 구해줘"…소방대원 6명 사망

  • 입력 2024.03.0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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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동 화재 참사 방화범 최모(당시 32세) 씨.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갈무리)
홍제동 화재 참사 방화범 최모(당시 32세) 씨.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갈무리)

[내외일보] 이현수 기자 = 2001년 3월 4일 오전 3시 47분 서울 서부소방서에 한 통의 신고가 접수됐다. 서대문구 홍제동 다가구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대원들은 녹번동 화재 오인 신고로 출동했다가 철수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출동 시간을 2분이나 단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법주차 차량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했다. 약 150m를 더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소방관들은 20㎏이 넘는 장비를 직접 들고 뛰어야 했다.

이날 발생한 화재로 소방관 6명이 순직하고 3명이 부상을 당했다. 소방관들은 집주인 아들을 구하기 위해 화마가 덮친 건물에 들어갔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 "아들이 안에 있다" 울부짖음…굉음과 함께 무너진 건물

소방관들은 진화 시작 5분여 만에 집주인, 세입자 가족 등 7명을 무사히 대피시켰다. 이때 집주인은 "아들이 안에 있다. 제발 구해달라"고 호소했다.

인명 구조 중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 (채널A 갈무리)
인명 구조 중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 (채널A 갈무리)

소방관들은 주저 없이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소방호스와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불길을 잡으며 더듬더듬 어두운 내부를 훑었지만,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열기와 유독가스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대원들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집주인은 "우리 아들은 어디 있어요? 왜 그냥 나와요! 사람이 있는데 왜 그냥 나오냐고요"라며 울부짖었다.

6명의 대원은 주저 없이 다시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거실, 아들 방, 안방, 주방, 화장실까지 더욱 꼼꼼히 수색했다. 대원이 지하 보일러실 수색을 마치고 지하 계단을 빠져나오는 순간 큰 굉음이 났다.

◇ 건물 안 소방관 6명 매몰…3시간 46분 만에 구조돼 이송

벽돌로 된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붕괴 직전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대원 6명이 그대로 매몰됐다. 현장에 있던 대원들은 재빨리 달려들어 잔햇더미를 치우기 시작했다.

구조 작업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쯤 콘크리트 사이로 대원 1명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망치로 콘크리트를 깨기 시작했다. 오전 5시쯤 현관 쪽에서 방수 작업을 하던 김철홍 대원이 매몰된 지 50분 만에 구조됐다.

매몰된 동료들을 찾고 있는 소방관들. (채널A '코끼리 사진관' 갈무리)
매몰된 동료들을 찾고 있는 소방관들. (채널A '코끼리 사진관' 갈무리)

오전 7시에는 마침내 건물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통로가 뚫렸다. 대원들은 바짝 엎드린 자세로 사방을 더듬으며 내부로 들어갔다. 돌조각을 치우면서 바닥을 기어다니던 그때 매몰돼 있던 대원 한 명이 손에 닿았다.

오전 7시 34분 이승기 소방관이 구조됐고, 오전 7시 37분 김기석 소방관이 구조된 후 3~9분 간격으로 박준우, 박동규, 장석찬, 박상옥 소방관이 차례로 구조됐다.

매몰된 지 3시간 46분 만이었다. 구조된 대원들은 지하 보일러실 쪽에서 구조돼 병원으로 이송됐다. 현장에 있던 구조대원들은 병원으로 이송된 동료들이 의식을 못 찾고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망연자실했다.

◇ 방화 저지른 범인은 '집주인 아들'…동료 대원들, 오열

하지만 유일하게 찾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집주인의 아들이었다. 구조대원들은 다시 작업과 수색에 나섰지만 아들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최 씨는 경찰 조사에서 불을 질렀다고 자백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갈무리)
최 씨는 경찰 조사에서 불을 질렀다고 자백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갈무리)

오전 9시 28분쯤 소방관들에게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려왔다. 화재의 원인은 방화였고, 방화범은 주인집 아들 최모(당시 32세) 씨라는 소식이다. 게다가 최 씨는 화재 당시 집에 있지도 않은 상태였다. 현장에 있던 대원들은 주저앉아 오열했다.

경찰은 최 씨에게서 자신이 불을 질렀다는 자백을 받았다. 최 씨는 "방안의 이불에다 던졌는데 저는 그 정도로 타다가 꺼질 줄 알았다. 그런데 훨훨 타더라"라고 말했다.

조사 결과 최 씨는 그날 새벽 술을 마시고 어머니와 심하게 다퉜던 것으로 전해졌다. 흥분한 최 씨는 어머니를 때렸고, 어머니가 밖으로 나간 사이 홧김에 불을 질렀다. 최 씨는 방화 후 겁이 나 친척 집으로 도망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 국민은 분노했다.

슬픔에 빠진 시민들 사이에서는 순직 소방관들을 위한 모금 운동이 진행됐다. 합동분향소에는 3일 동안 3만 명에 가까운 조문객들이 찾아왔다.

서울 시청에서 엄수된 합동 영결식.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갈무리)
서울 시청에서 엄수된 합동 영결식.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갈무리)

◇ 연이은 순직 사고…소방관들 "처우와 권리 개선" 촉구

6명이 순직한 홍제동 화재 참사는 소방관들의 열악한 처우 개선의 계기가 됐다.

당시 소방관들은 오전 9시 출근해 24시간 동안 근무하는 2교대 근무 체제로, 하루 평균 7회 이상 현장에 출동하는 격무에 시달렸다. 소방관을 위한 경찰, 군인과 달리 전문병원도 없었고, 부상을 당해도 자비로 치료 후 보상을 신청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다.

참사 이후 소방관들에게 방수복이 아닌 방화복이 전면 보급됐고, 현장 소방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무소방대가 창설됐다.

참사 이후 23년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처우 개선을 바라는 목소리는 여전히 뜨겁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소방본부는 연이은 소방 공무원 순직 사고에 지난달 26일 '7만 소방관 총궐기대회'를 열고 "두 달 전 제주에서 한 소방관을 떠나보내고 쓰라린 가슴을 달래기도 전에 경북 문경 화재로 두 분의 젊은 소방관을 떠나보냈다"며 "소방관의 처우와 권리를 개선해달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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