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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전, 2·8 독립선언을 떠올리며

  • 입력 2013.02.12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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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들에게 민족의 자유와 독립의 염원을 담은 만세운동은 3?1운동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3.1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과 그 기폭제 역할을 했던 2?8독립선언이 많이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국내 독립운동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인 측면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했던 2?8독립선언이 3?1운동 등에 국한된 관심으로 묻히고 있어 아쉬울 따름이다.

지난 8일은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자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재일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선포한지 94주년이 되는 날이다.

2?8독립선언은 한국학생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항일독립운동의 최고봉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의가 계기가 됐다. 이러한 세계적인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재일 한인 유학생이 구성원인 ‘조선유학생학우회’ 주최로 개최된 유학생 웅변대회에서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했다.

최팔용, 송계백 선생 등 10명의 실행위원이 서명하고, 재일 한인 유학생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 있는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조국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후 2?8독립선언은 국내 3?1운동의 기폭제가 됐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발단이 됐다. 더 나아가 대한민국을 넘어 중국5.4운동에 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써, 일본의 무력침략에 고통 받고 있던 아시아의 독립운동에 불씨를 지피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우리의 선열들과 애국지사들께서는 이후 30여년 동안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순국선열들께서는 풍찬노숙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조국 광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았기에 1945년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선열들의 피와 눈물로 대한민국은 주권을 회복했고, 선열들의 불굴의 기개를 이어받아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광복을 이루고, 일제의 탄압을 떨쳐낸지 불과 1세기도 지나지 않았건만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제국주의의 근성을 다시금 드러내고 있다.얼마 전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이 독도 문제를 다룰 영토전담부서 설치를 추진하는 등 끊이지 않는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역사를 왜곡하는 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일본의 이러한 도발에 대해 우리 정부가 확실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더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열망으로 적진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라를 되찾으려던 순국선열들의 기개를 이어 나가려면 우리는 아직 부족한 듯이 보인다. 이제부터라도 일본의 역사를 왜곡하는 망언과 우리 영토를 넘보는 수작을 다시는 내보이지 못하도록 확고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2?8독립선언 94주년을 맞아,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놓고 독립을 외쳤던 선열들의 기개를 다시한번 떠올리며, 일본의 검은 야욕을 잘라내도록 온 국민이 한 목소리를 내기를 바란다. 선열들의 숭고한 피로 지켜낸 대한민국의 영토가 그 흙 한줌이라도 다시는 일본의 칼에 잘려나가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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