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손 / 이상범
-서시
두 손을 펴든 채 가을 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 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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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자 비움의 계절입니다. 손에 쥐게 되는 것들이 많아지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놓아주어야 하는 것들도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가을은 긴 시간 정성들여 키운 것들을 거두어들여 남들과 수확물을 나누며 풍요로움을 즐기는 계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판을 마주해야 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텅 빈 들판을 바라보는 일은 뿌듯하면서도 쓸쓸한 일입니다. 곧 그곳에 겨울이 당도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인생의 가을도 비슷합니다. 그동안 애써 노력한 덕분에 모든 것이 넉넉해졌지만, 곧 다가올 “눈발 같은” 겨울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니 인생의 가을에 이르면 비우고, 놓아주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넉넉해진 “빈손”으로 “떠날 날”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