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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안도현의 ‘여우와 함께 산책을’ 해설

  • 입력 2022.11.0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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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함께 산책을 / 안도현

 

  눈 내리는 산길을 혼자 걷다가 여우를
  한 마리 만나면 나는 쇄골이 하얘질 것이다
  여우한테 넘어가서 여우를 따라서 눈이 더 세차게 몰아치는 골짜기로 들어가서 나는 여우굴에 들어가서 백년 동안 신세를 지고 살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여우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고심 끝에 나는 여우가 찍어 놓고 간 발자국을 먼저 찾아보기로 하였다
  여우는 제가 지나간 흔적을 꼬리로 지우고 자신의 경력을 길게 기술하지 않는다 하였다

  솔직히 남조선은 지루하다는 것 있는 게 너무 많고 있어도 갖고 싶은 게 많다는 것 없으면 모두들 갖고 싶어 죽도록 출근한다는 것

  여우를 만나면 나는 이렇게 말할 작정이다
  한 달에 한 번쯤은 함흥을 갔다가 오자 여기는 국경이 없어 슬프지 국경이 없어서 월경이 없잖아 월경이 없어서 넘어가는 일이 없잖아 넘지 못해서 일탈이 없잖아 헛된 것을 한 번도 쫓아가 보지 못하고 의미 없는 것을 평생 물어보지 못하고

  여우는 제 발자국을 다 지우지 못하고 총총 사라진 게 틀림없었다
  그 골짜기, 눈 퍼붓는 응달에
  산수국 마른 가지 끝에
  여우가 발자국을 얹어 놓은 것을 발견하고 나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여우는 신접살림을 차리러 떠났다는 말인가

  모쪼록 여우와 함께 산책을 하고 싶다면
  그 산수국 헛꽃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찾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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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백석의 여우난골족이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같은 작품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단번에 이 작품 속의 여우가 시인 백석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자는 눈 내리는 산길을 혼자 걷다가 여우를/ 한 마리 만나면” “여우를 따라서 눈이 더 세차게 몰아치는 골짜기로 들어가서” “백년 동안 신세를 지고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우는 이미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는 수없이 화자는 여우가 찍어 놓고 간 발자국을 더듬어 따라가기로 합니다. “눈 퍼붓는 응달에산수국 마른 가지 끝에도 꽃 피고 지는 매 순간 여기저기에 여우가 발자국을 얹어 놓은 것을발견하게 됩니다. 요즘 시 쓰는 사람 중에 백석에게 빚지지 않은 이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천재는 이념으로 남과 북이 갈린 세상에서 불우한 삶을 살다가 갔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문학의 길을 걷는 많은 후배 시인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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