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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홍일표의 ‘중세를 적다’ 해설

  • 입력 2023.05.1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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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적다 / 홍일표

 

검은 눈을 헤쳐 보면 흰 눈이 나올 거라는
그런 희망 따위가 지구의 표정을 바꾸는 건 아니겠지만|
맨손으로 아침의 껍질을 벗겨서
식탁 위에 올려 놓는다
몇 마리 새가 날아와 햇살 몇 줌 쪼다가 흑해의 어둠 속으로 투신한다
뿌옇게 날이 밝아 올 때까지
난파된 배 한 척 인양하여 진흙투성이 바닥을 끌고 나올 때까지

 

다시 온다
무궁한 세계의 아침과 저녁이 그리고 청동으로 빚어 만든 밤이 쇠사슬을 끌고 저벅저벅 온다 낯익은 미래를 만나는 거다 수백 년 전 깨진 얼굴, 불타버린 심장이 다시 오는 거다

머릿속에 가득한
죽은 글자들
예언자의 입에서 번쩍이는 미래
너의 머리통을 부술 때까지 나는 해안 끝자락에 서서 세기의 어둠에 불을 지를 것이니
용서하라
아니 심판하라
죽어도 죽지 않는 샛별의 언약

아우성과 분노, 회한과 탄식을 끌고 빛을 따라 흘러 다니던 사람들은 혀가 찢겨서 성 밖으로 던져지고, 신의 음성은 갈수록 또렷하여 창과 검을 든 외눈박이 시종들이 몰려가는 곳마다 태양이 죽는다

그래, 그리하여 희망 따위에게 묻곤 한다
오늘의 중세는 언제까지냐고
뭇 생령들을 고문하는 당신의 판타지가 지겹지 않느냐고

 

___________________

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보통 중세를 암흑기로 표현하곤 합니다. 이성과 합리성 대신 편견과 광기가 지배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 편견과 광기는 결국 수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 시켜버리는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과학과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지만, 정말 우리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여전히 인터넷에서는 나와 다른 집단에 대한 편 가르기와 혐오가 가득합니다. 마녀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시인은 이 작품을 통해 중세는 언제까지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중세는 어떤 특정한 과거의 시간이 아닙니다. 광기에 가까운 혐오와 증오가 들불처럼 번지는 세상이 바로 중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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