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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강인한의 ‘램프의 시’ 해설

  • 입력 2024.03.14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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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의 시 / 강인한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마음이 마른 붓끝처럼 갈라질 때, 램프에 불을 당기십시오. 그러면 오렌지 빛깔의 나직한 꽃잎들은 하염없이 유리의 밖으로 걸어나오고, 어디선가 문득 짤랑거리는 금방울 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희미한 옛 성이 흘러나오고 그 속에서 장난감 말 두 마리가 청색의 어둠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것을 당신은 또 보실 수 있습니다. 검은 갈기를 물결치며 물결치며 달려오는 이 작은 쌍두마차의 뜻하지 않은 출현에 몇 파운드의 눈발조차 공중에 튀고 있습니다.

 

  램프에 불을 당기십시오. 어둠에 얼어붙었던 모든 평화의 장식물들을 그래서 훈훈히 녹여주십시오. 성에가 끼기 시작하는 유리창에는 알 수 없는 나라의 상형문자가 나타나 램프의 요정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비단뱀이 땅속에서 꾸는 이 긴 겨울 밤의 천 가지 꿈에 대해서, 에로스가 쏘아부친 보이지 않는 금화살의 행방에 대해서, 아아 당신 생의 의미에 대해서 말해줄 것입니다. 램프의 요정을 찾아오는 어떤 바람결에는 당신의 이름이 섞여서 나부끼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램프에 불을 당기십시오. 일에 시달려 당신의 온몸이 은박지처럼 피곤하여질 때, 뜨거운 차라도 한 잔 끓이고 있노라면 아주 먼 데서 미다스 왕의 장미꽃들이 눈 속에서 무거운 금빛을 툭툭 터는 소리가 들려올 것입니다. 찻잔 속에 피보다 진한 밤의 거품이 가라앉고, 당신의 부름에 좇아 그리운 흑발의 머리칼이 떠올라선 어두운 당신의 얼굴을 포근히 감싸줄 것입니다. 찻잔 밖으로는 돛대를 높이 단 배 한 척이 눈보라 속을 홀린 듯 흘러나오고, 고운 가락의 옛 노래와 같이 어떤 두 사람의 끝없는 발자국이 먼 해안의 모래밭 속에 가만가만 감춰지고 맙니다.

 

  끊을 수 없는 욕심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영혼이 끓어오를 때 램프에 불을 당기십시오. 그 조용한 불길의 칼에 지나온 눈물을 더하십시오. 그러면 고요의 은빛 바다가 말없이 열리고, 빨간 루비의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은 가슴 설레며 몰려가 저마다의 정다운 꽃등을 높이 든 채 바다로 나가고……. 아 그럼 사랑하는 이여, 당신도 이 겨울이 다 가도록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나의 램프를 밝혀 들고 조용히 흔들어주시렵니까. 꺼지지 않는 루비의 램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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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아주 오래된 겨울의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방은 어둡고 한기를 품은 벽은 오래도록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방 가운데 놓인 낡은 램프에 불을당기고 성냥개비가 타오르는 것을 봅니다. 성냥개비의 불꽃은 이내 사그라들고 위태롭게 흔들리던 연약한 불씨는 유리병 안에서 안정된 듯합니다. 램프의 빛을 받은 방의 윤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옵니다. “희미한 옛 성이 허공에 떠오르고 멀리서 장난감 말 두 마리가 청색의 어둠을 펄럭이며 달려오는소리가 들립니다. 그제야 아주 오래전 누군가 지어 놓은 언어의 성 안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은박지처럼구겨진 몸과 마른 붓끝처럼갈라진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들며 따뜻해집니다. 작은 불꽃 속에 겨울 밤의 천 가지 꿈을 준비해 둔 사람은 놀랍게도 팔순의 시인이었습니다. 반세기 전에 밝혀둔 작은 불씨가 여전히 따스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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