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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기자명 최형심 시인

[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 김송포의 ‘진열은 사열이다’ 해설

  • 입력 2024.03.2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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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열은 사열이다 / 김송포

-정숙자 시인의 서재

 

  군인의 아내로 사는 일은 사열하는 것이다 사열하는 것은 정돈이다 사열보다 중요한 것은 서열이다 서열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릇은 오래된 것부터 새로운 것까지, 음식은 발효된 장아찌부터 말린 부지깽이나물과 최근 무친 나물까지, 하물며 책장에 진열된 책은 태어나기 이전의 족보부터 손글씨로 쓴 연모의 구절과 액체 계단의 사건과 지독한 쓸쓸함과 아픔이 병사의 도열처럼 흐트러짐 없이 장렬하다

  가장 귀한 것 중의 하나는 가나다순으로 이름을 올린 시집이 이중 대열로 한 치의 착오 없이 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라면 집에 가서 이름을 확인해야 한다 이름이 없다면 유산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작은 문화를 쓰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치를 날마다 들여다본다 남긴 글자를 먹는다 자신을 낮추는 일은 다른 사람을 높여 부르는 일이다 유산은 하루에 만여 자의 글자를 고르는 일부터 직접 타자를 치는 일이다 글자는 밥보다 중요하다

  세우고 부서지는 일이 손끝에서 시작된다 한강의 물줄기가 햇빛에 반사되어 물별의 행진이 오래오래 이어질 나눔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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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시인
최형심 시인

팔순이 가까운데도 감각적인 시를 쓰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몇몇 원로 작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놀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숙자 시인도 그중 한 분입니다. 염색하지 않은 백발, 단정하게 쪽 찐 머리,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당당한 말투. 시집을 받으면 손수 따서 말린 꽃으로 장식한 편지지에 빼곡하게 손글씨로 작품을 필사해서 보내주는 사람. 환경을 위해 재활용 종이로 직접 만든 봉투만 사용하는 사람. 까마득한 후배에게 먼저 전화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일찍 자리를 떠서 아쉬웠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 대쪽같은 사대부의 피를 물려받은 것 같으면서도 그 누구보다 겸손한 자세로 자연과 인간을 섬기는 사람. 그의 서재는 안 가봐도 가본 것 같습니다. 그 정갈한 성품이 서재 곳곳에 배어있을 게 분명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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